<이모션디자인 레포트>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감상평

- 슬픔과 기쁨의 상호 공존 -

 2012211100 최묘정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명예교수인 폴 에크만은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을 기쁨(joy), 슬픔(sadness), 분노(Anger), 공포(Fear), 혐오(Disgust), 놀람(surprise) 의 6가지로 나누었다. 그 외에 불안이나 고독과 같은 감정은 위의 6가지 기본적인 감정을 바탕으로 생겨나는 2차적인 감정이라고 보았다.

 물론 인간에게 발현되는 감정의 특징들을 모아 분석하고 분류하여 위와 같은 6가지의 범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에는 동의를 한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을 수리적인 방법으로 분석하고 연구하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감정이 발현 될 때, 특정 감정이 지배적일 수는 있어도 하나의 감정만이 단일하게 나타나기 어렵고, 주변의 다른 주체들의 감정에도 영향을 받을 수 있기에 특정 상황에 발생한 감정이 명확하게 경계를 짓기 애매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라는 시는 많은 한국의 중·고등학생들이 교과서나 자습서를 통해 접하게 되는 시 중 하나이다. 주로 ‘소외계층에 대한 따뜻한 시선 요구,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주변을 돌아보기.’정도로 시에 대해 수업을 듣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시를 읽으면서 시의 본질적인 주제인 ‘인간의 이기심 탈피, 타인(특히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에서 더 나아가 시에 드러난 인간의 감정들 중 정반대의 감정이라 볼 수 있는 슬픔과 기쁨의 공존 가능성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

 시에서 말하는 대로라면 특정한 상황, 환경에서 그 때 나의 슬픈 감정은 상대에게 기쁨일 수 있고, 나의 기쁜 마음은 상대에게 슬픔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 순간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타인보다 ‘나’를 우선시하는 시각으로 감정을 느끼기 때문에 타인이 슬프더라도 나에게는 기쁨으로, 나는 슬프지만 타인에게는 기쁨으로 다가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연구를 통한 명백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경험적으로 느꼈던 이야기를 해보자면, 인간은 태어나 사회적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동료나 주변인들과 의사소통, 상호교류를 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새로운 무리집단 속에서 살아가기 시작한다. 이 때 이 집단을 유지시켜주는 가장 큰 요소가 ‘같은 생각(공감대)’ 이다.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성향을 지녔고 자라온 환경 또한 천차만별이기에 서로에 대한 완전한 공감은 이루어 질 수 없지만, 사회 속에서 교류하면서 상대방의 입장에 대해 숙고하고 이해하며 공통된 생각을 하게 되고 배려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현대사회로 오면서 안타깝게도 인간의 공감 능력은 현저히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지내온 오늘과 다가올 내일이 또 다른 현대를 살고 있다. 이에 그 속도를 따라가기에 지친 사람들은 “나 살기도 바쁜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러다 보니 위 시의 내용처럼 좌판에서 추위에 떨며 귤을 파는 할머니의 귤 값을 깎으며 나의 기쁨에만 집중하고 할머니의 슬픔에는 공감하지 못하는 비극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쯤에서 이 감정들의 주체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 그리고 나의 주변인들이라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기심만 가득한, 남을 바라볼 줄 모르는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걱정하고 배려하고 공감하며 함께 아픔과 기쁨을 나누기도 했을 것이다. 좌판에서 떨며 귤을 팔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엄마를 졸라 좌판의 귤을 모조리 사야만 직성이 풀렸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팍팍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고자 발버둥 치다 차츰차츰 찾아온 이기심은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던 공감, 배려라는 능력을 점점 약화시키기 시작했을 것이다. 밀려나고 밀려난 공감능력, 배려능력은 이윽고 거의 소멸하는 지경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기심의 뒤편에는 아직 인간의 공감능력, 배려심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나의 기쁨의 댓가로 치루어진 남의 슬픔이, 나의 찔리는 양심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나의 기쁨 속에는 애써 무시하고 싶은, 상대의 슬픔으로 인한 나의 슬픔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공감능력과 배려심은 이기심, 나‘만’의 기쁨과 늘 함께해왔지만 숨가쁜 일상에 그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작가는 우리에게 사회에 만연한 이기심을 일깨워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기심의 저편에 타자에 대한 배려심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기대하고 있기에 우리에게 더욱 호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생은 마라톤’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생은 끊임없이 나아가야만 한다. 살아가며 무작정 달리기만 하는 것도, 계속 걷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달릴 때 달리더라도 가끔은 속도를 낮춰가며 내가 아닌 나의 주변을 살펴보는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스스로 규정해버렸던 나 라는 존재를 내려놓고 가끔은 나의 내면에 깃들여있는 타인에 대한 관심, 배려를 끄집어내었으면 한다. 그렇게 된다면 슬픔과 기쁨이라는 감정은 공존하며 상호 교류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