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기계화와 제품 디자인  
 
약 150년 전...맬서스(Reverend Thomas Malthus)나 부어(M. C. Buer)가 살던 동네는 위생 수준이 분명 높았음에 틀림 없다. 그들이 지적한 비참함과 추악함은 사실 빈곤과 열악한 아동 양육의 이면에 있는 모습이었을 뿐이다. 기아와 질병, 불결한 환경 외에 인구 패턴에 영향을 끼친 또다른 요인으로 알콜중독이 있었다. 특히 스웨덴 같은 북구제국에 만연했고, 1869년 런던에만도 447개의 큰 술집과 8,659개의 간이주점이 성업중이었으며, 몇몇 술집에는 하루 손님이 5,000-6,000명이나 되었다. 도시의 `유모들(Angelmakers)`은 진(gin)을 먹여 애를 조용히 잠들게 하는 것이 사실상 그들의 일이었고, 이는 `영양실조를 가장한 아동 살인(infanticide)`이었다. 국가적으로도 영아유기가 공공연히 자행되었고, 나폴레옹 치하 프랑스의 경우에는 친부모의 의사와 상관없이 병원이 유아를 다른 곳에 보내는 것이 합법적이었다. 병원에 수용되는 경우는 극히 일부였고, 시골 가정으로 많이 보내지면서 가는 중에 죽거나 영양실조와 보살핌 부족 등으로 사망했다. 실로 많은 유아들이 버려졌다. 프랑스의 경우, 1833년에만 127,507명의 어린이가 버려졌고, 이는 태어난 아이의 20-30%에 해당한다. 이탈리아의 어떤 병원의 경우 생후 일년 내 유아 사망율이 80-90%나 되었다. 1818년 파리의 메종 드 라 꾸세(Maison de la Couche)에서 태어난 4,779명의 어린이 중 2,730명이 3개월 내에 죽었고 다시 956명이 일년 내에 사망했다. 원치 않는 아이를 작은 개스실에서 저 세상으로 보내는 것은 차라리 인도주의적인 조치였다.(William L. Langer, `Europe`s Initial Population Explosion`, Kenneth F. Kiple and Stephen V. Beck ed., Vol 26, `Biological Consequences of European Expansion 1450-1800(Ashgate Variorum 1997)-An Expanding World-The European Impact on World History 1450-1800`, p. 343-359에서 발췌)
    
 
핵가족, 자본주의의 기본 동력


이것이 바로 약 150년 전까지 서유럽의 모습이었고 사람들은 세기가 바뀌기 직전까지 어떤 변화도 느끼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자본주의와 산업주의가 분명히 깨닫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동원할 양질의 노동력을 얻기 위해서는 가부장제가 굳건히 서있는 가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도라는 두 개의 거시적이고 보편적인 사회제도가 결합하여 핵가족, 가전 제품을 포함한 가재 도구의 사적소유 그리고 여성의 가사노동 전담을 창출하고 유지시키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이것이 성공적으로 완성된 모습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안정적이고 순응적인 노동력을 생산하고 재생산해줄 매개체를 요구한다. 자본주의는 여성 스스로 자신이 존재할 `적합한` 장소로서 가정을 선택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사회 비상사태시 여성을 산업 예비군으로 활용할 수 있기를 원한다. 가부장제 역시 이같은 상황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체계하에서는 여성이 복종적이어서 남성을 강력하고 좀더 편안하게 만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은 자본주의 체제를 지켜줄 건강한 산업 노동력(남편)과 산업 예비군(자녀)를 산업의 소비기반(가정)에서 유지 보수하고 양육하는 막대한 직무를 책임지면서 동시에 재화와 제품에 대한 대규모 소비시장을 형성하는 주체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여성의 이러한 기능은 별다른 평가를 받지 못하며 부가 가치로 계산되지 않고 따로 임금이 책정되지도 않는다.


가전 제품의 도입과 가정 기계화


1930년대 전후 미국의 부유한 가정을 중심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가스오븐, 진공청소기, 전기세탁기와 다리미, 전기 냉장고, 자동차 등은 주부의 가사일에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기계를 이용하면서 이전에 하인에게 시키던 힘들고 번거로운 일을 안주인이 직접 나서 챙기게 된 것이다. 단정하게 매니큐어를 칠하고 머리 장식을 한 주부 같지 않은 주부들이 이 시절 광고에 등장하면서, 가사노동은 더 이상 허드렛일이 아니라 오히려 주부의 인격의 표현이며 가족에 대한 그녀의 애정 표현이란 뉘앙스를 띄기 시작한다. 세탁은 가장 빨리 끝나는 일이며 사랑 표현의 수단이 되었고, 갓 결혼한 신부는 남편 셔츠에 있는 때를 없앰으로써 자신의 애정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가족에게 매끼의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 전에는 하루일과 중의 하나였지만 이제 그것은 감정이 깊이 배어있는 의사소통의 수단이 되었다. 기저귀를 채우는 것은 아이에게 안정감을 형성시키는 일이되었고, 욕실 청소는 가정을 질병에서 보호하려는 모성본능에서 우러나오는 일이 되었다.


확실히 이렇게 감정적으로 중요한 과업을 내가 아닌 하인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이었고, 기계와 화학약품을 써서라도 주부 스스로 해야 할 일이었다. 잘 조직된 부엌과 냉장고 덕에 웬만한 식사와 요리는 주부 혼자 차릴 수 있었고, 세탁기가 하인 대신 옷을 빨아주고, 바퀴달린 진공청소기를 이리저리 끌고 다닐 힘만있으면 집안 청소는 대강 치뤄낼 수 있었다. 식료품은 소매점에서 배달시키는 대신 직접 운전하여 나가 사오면 되었다. 건강하고 양식있는 자녀를 키우기 위하여 주부는 항상 양육과 교육에 직접 관여해야 한다. 가장 윤택한 계층의 주부들조차 직접 가사일을 돌보게 된 것이 현대 생활의 특징이다. 변호사의 아내도 벽돌공이나 청소부의 아내와 마찬가지로 욕실 바닥을 닦느라 땀흘리고 먹음직스런 저녁을 내기 위해 장보고 요리해야 한다. 가전 제품과 가정용 기기는 모든 계층의 주부를 평준화하였지만, 가사 노동 그 자체를 없애진 않았다. 오히려 더 조직화하고 체계화함으로써 남편과 자녀의 도움을 배제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럼에도 왜 각 세대의 수백 만의 여성들이 결혼을 선택하고 자녀를 낳고, 주택을 구입하고 관련도구를 구매하는데 협조적이며, 심지어 한편으로 주부 역할을 하면서 시간제로라도 나가 일하면서 가사와 가전제품 구입에 돈을 보태려 하는가? 이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멋진 환경


1930년대 이후의 미국과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과 일본, 다시 197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산업 디자이너들에게 가장 많은 일거리를 제공한 것은 가전제품 생산업체일 것이다. 오늘날에도 가장 많은 제품(산업) 디자이너들이 고용되어 있는 부문은 라디오에서 대형 냉장고에 이르는 가정내 오락과 가사 기계화에 관련된 제품 생산업체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들 제품의 주된 사용자는 가정주부이다. 과연 이런 광범위한 가정 기계화와 주부를 위한 심도있는 디자인 활동은 주부의 일을 얼마만큼 덜었으며 가사노동을 합리적으로 조직하였을까? 가전제품 덕에 주부는 예전보다 여유로와졌고 가정생활은 그 어느 때 보다 윤택해졌는가? 결론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가전 제품은 이의 기능 발휘에 관련된 모든 업무를 주부에게 일임함으로써 노동의 강도를 줄여준 대신, 제품관리라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했다. 기계 덕분에 노동 시간과 강도, 기술적 난이도는 어느 정도 줄어든 대신 기계의 유지 보수를 포함한 관리시간이 늘었다. 기계는 말로 지시할 수 없기에 주부 스스로 사용설명서를 보고 익혀야 하며 제대로 작동시키기까지는 상당한 노력과 시간을 투자토록 한다. 가끔 오작동으로 문제가 생길 경우 그 책임은 통상 주부에게 돌려지며 기계에 비싼 돈을 지불한 남편에게 질책을 받아야 한다. 반면 과거에는 주부가 하인에게 잘못된 지시를 내릴 일은 별로 없으며 설사 잘못되더라도 주부가 혼나는 경우는 없다. 예전에는 마님 대신 싫은 소리는 식모나 하인이 들어야 했다. 하인은 아침에 출근하여 일을 돌보고 저녁에 자기 방으로 돌아가거나 퇴근하여 자기 집에서 쉼으로써 스스로 관리되지만, 기계는 일을 끝내고도 그 자리에 계속 남아 주부에게 별도의 보살핌과 유지보수를 요구한다. 게다가 대부분의 고장은 주부의 해결 능력 바깥에 있는 것이라 설명서를 뒤져 애프터서비스를 신청해야 하며 수리공이 올 시간에 맞추어 집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 이들이 수리를 잘 끝내는지 지켜서서 감시하거나 아니면 제발 잘고쳐 놓도록 음료수를 준비해가며 보살펴야 하고, 가끔 부주의한 제품관리를 이유로 수리비를 지불하면서까지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 게다가 심각하게는 수리공이나 검침원을 가장한 악덕 외판원이나 강도로부터 가정을 방어해야 하는 임무까지 부여받았다. 가전업체와 제품 디자이너들은 집안에서 하인을 내쫓고 부엌에서 애들과 남편을 몰아낸 후 기계와 주부를 묶어 이처럼 새롭고 환상적인 노동환경을 선사해주었다.     
 

요구사항의 예


가정용 냉장고는 비교적 장기간 식품을 보관 보존하며 한여름에 시원한 과일과 음료수를 즐길 수 있게 해준다. 수퍼마켓 식료 매장의 대형 냉장고를 추종하는 이 기계는 풍성한 식탁을 보장하는 다양한 식료품이 진열되게 되어 있다. 이를 위하여 주부의 머리 속에는 보관중인 식료품과 음식재료의 목록이 기억되어 있어야 하며, 부족한 품목을 채우기 위하여 출납상황을 기록하고 부단히 수퍼마켓을 오가며 물건을 사다 채우고, 필요할 경우 스스로 운전하여 대형 할인매장까지 다녀와야 한다. 그리고 이런 쇼핑을 포함하여 보통 대낮에 거리에 나선 아줌마 운전자는 할 일 없이 교통체증을 일으키는 주범으로 지목받을 각오쯤은 해두어야한다. 동기야 어떻든 가정을 위해 거리에 나선 여자가 인정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냉장고 내부는 항상 청결하게 유지되고 각 아이템은 잘 정돈되어 있어야 하며 김치냄새 등 불쾌한 향을 제거하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탈취제를 교환해주어야 함은 물론이다. 냉장고 선반이 지저분하거나 갑자기 먹고 싶은 시원한 콜라나 아이스크림이나 맥주가 그 안에 없으면 그 책임은 주부에게 있다. 요즘은 계기판을 면밀히 조작하면 가끔 먹을 만한 김치를 숙성시켜주는 냉장고가 개발되어, 주부가 밤을 새워서라도 충분한 시간 투자와 학습만 한다면 자신의 실력을 새삼 과시하고 가족 구성원을 즐겁게 해줄 수 있게 되었다. 이 냉장고의 등장으로 친정에서 얻거나 수퍼에서 사온 김치를 식탁에 올리는 주부는 실력이 떨어지거나 남편과 자식에 대한 애정을 결핍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되게 되었다.


세탁기는 깨끗한 의복을 통하여 가족 구성원을 사회생활에서 빛내주는 필수 장비다. 세탁기가 있음에도 속옷을 제때 안 갈아 입거나 겉옷을 규정된 기간 이상 걸치고 있으면 아내의 잔소리를 듣거나 아니면 칠칠치 못한 아내로 찍혀야 한다. 주부는 가족 구성원 및 계절에 따른 각종 의류가 항목별로 입혀지고 벗겨져 세탁되고 건조되어 다려진 후 다시 옷장에 수납되고 다시 입혀지는 제 과정을 면밀히 기억하고 관리해야 한다. 세탁기와 다리미는 이 모든 과정의 중심에서 작동하는 핵심 기재가 된다. 세제와 표백제와 섬유 유연제와 분무형 풀은 주의 깊게 선택되어 적절히 계량되어 투입되고 분사되어야 하고 세탁조에 의류는 색상별로 재질별로 분류되어 들어가게 되어 있고, 세탁 및 다림질 온도는 옷감마다 다르다. 세탁 후 때가 제대로 빠졌는지 면밀히 검사해야 하고 세탁중 떨어진 단추나 장식물을 제자리에 다시 고쳐놔야 한다. 이웃을 생각하여 이른 아침과 늦은 밤을 피하여 작동되어야 하며 중심이 어긋나 퉁탕거리지 않도록 세탁물의 중량조절도 잘해야 한다. 의류별로 체계적으로 수납하여 가족들이 입고 싶은 옷을 곧바로 꺼내주거나 대충 입었을 경우에는 다시 벗겨내고 제대로된 짝을 찾아주어야 유능한 주부일 것이다.


그동안 남편은 리모콘을 이리저리 돌려대며 입이 심심할 테니까 술상을 봐줘야 할 것이고, 재털이를 비워줘야 할 것이며, 방 안에서 공부하거나 컴퓨터 오락을 하는 자녀를 위해 간식을 챙겨주고 바닥에 뒹구는 과자봉지와 책상 위의 콜라병을 치워들고 나오면서 부모의 존재를 알리는 의미에서 일정 수준의 잔소리를 해야 할 것이다. 오븐과 전자렌지와 식기세척기와 냉장고와 세탁기의 스위치를 끄고 켜고 타이머를 맞추고 식탁을 닦아내고 그릇을 수납하며 세제를 투입하고 수량을 조절하고 밀폐용기를 채우고 필터를 교환하며 쓰레기를 분리하는 동안 양질의 서비스 속에 마음껏 자유로운 주부 이외의 모든 집안 사람들은 놀고 공부하고 사고치고 음악을 듣는다. 그래서 싱크대에도 이젠 라디오가 달리게 되었다. 이제 전자렌지나 씽크대 문짝에 초박형 텔레비젼을 붙여주는 일만 남았는데 그러면 주부가 잠깐 거실에 나와 남편과 나란히 연속극 볼 일도 없이 그냥 부엌에서 계속 있어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