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 디자인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앞 내용의 줄거리는 인간의 도구 제작을 중심으로 `가상미래우발성(an imaginary future eventuality)에 대한 계획적 대비`와 `호모 파베르(homo Faber)적인 인간 본성론`을 중심으로 디자인의 본질을 살핀 것이다. 이와 같은 접근에 있어서 문제는 그 의미와 정의 영역이 너무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인간 활동 대부분이 디자인 활동으로 분류됨으로써 전문적 서술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디자이너가 디자인이라고 정의한 것을 공학자는 `공학`으로, 과학자는 `과학`으로, 장인은 `공예`로, 요리사는 `요리`로도 정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비교적 최근의 디자인 연구가인 빅터 파파넥(V. Papanek; 1925-98) 조차도, 이와 동일한 시각에서 디자인 활동을 정의하고 있다. 그의 책 `인간을 위한 디자인(Design for the Real World)` 첫머리에는 다음과 같이 써있다.


`모든 사람은 디자이너다. 인간이 행한는 거의 모든 행위는 디자인이다. 왜냐하면 디자인이란 모든 인간 활동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고 예측하는 목표를 향하여 계획하고 정리하는 모든 행위는 곧 디자인 프로세스를 의미한다. (중략) 디자인이란 서사시를 쓰고 벽화를 그리며... 협주곡을 작곡하고... 책상서랍을 깨끗이 정리하거나... 수술을 하고... 파이를 구워내고... 야구팀을 편성하고... 어린이를 가르치는 일이기도 하다. 디자인은 의미있는 질서를 창조하는 의식적인 노력이다.`


학생들에게 `디자인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보고서를 쓰게 하면 가장 많이 인용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대학교 1학년 수준의 논지로는 대략 받아들일 수 있겠으나, 계속 이런 시각에 머문다면 문제가 된다. 앞서 말한대로 `디자이너` 대신 공학자나 건축가나 과학자 혹은 공예가를, `디자인`에는 공학이나 과학, 건축, 공예 등등을 대입해도 모두 말이 된다. 의미 규정의 특수성과 전문성이 성립하지 못하는 것은 정의라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서술요건이 성립하지 못하면 해당 분야 본연의 지식체계를 규명하고 체계화할 수 없다. 디자인에 관련된 많은 저술들이 이런 순환론적 논리에 빠져 있다. 나는 오늘날 디자인의 학문적 난맥상의 출발점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갈수록 심각한 문제로 느껴지는 것은 자칭 디자인 전문가들의 연구 논지와 서술도 많은 경우 아직 이 테두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디자인, 특히 `제품 디자인`이 관련 주변 분야에 대해 전문화할 수 있는 영역을 둘로 요약한다.
하나는 제품의 미적 혁신이고 또 하나는 제품의 기술적 특성을 사용자(소비자)에게 좀더 명확하고 상징성 있게 전달하여 제품의 종합적 가치와 성능을 높이는 일이다. 물건을 진짜 멋있게 디자인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제품의 미적 혁신은 타 분야가 못하는 디자인 고유의 전문적인 기능이다. 따라서 여기서 먼저 결판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두번째, `기술특성의 기능적-상징적 종합에 의한 제품의 성능제고`는 미래 기술 시스템의 전개 방향과 기술의 사회구성적 측면을 예측하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1950년대에 나온 한 공상과학소설의 표지에 그려진 미래의 우주선의 조종석은 B-29 폭격기의 구형격자유리로 싸여 있고 프로펠러 추진형 비행기의 모습을 한 동체와 날개 여기저기에 제트 엔진을 부착한 모습이었다. 현재의 기술적 성과를 재조합하여 묶어내는 감각 정도로는 제대로 된 제품 디자인이 못 나온다.


`스타워즈` 등 잘된 SF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감동은 미래 기술시스템과 이의 설득력 있고 상상력 풍부한 가시화에서 비롯된다. 물론 '피융' 광선총 나가는 소리에 맞아 폴발하며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면..이런 것은 거짓이다. 우주에는 공기가 없으므로 음파가 전달될 수 없고 산소가 없으므로 연소하지 못하고 공기가 없으니 연기의 뭉개 구름도 없다. 하여간 미래의 많은 제품은 사이버스페이스에서만 존재하다 사라질 것이다. 이 공간이 더 자유롭고, 풍부하고, 순환이 빠르며 그만큼 부가가치도 높다. 가상 제품 디자인(virtual product design)의 문이 활짝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