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종 연세대학교 


 


1. 서론




울름조형대학(1)은 1953년 독일연방공화국(Bundesrepublik Deutschland, BDR, 이하 서독) 바덴뷰르템베르크(Baden-W웦ttemberg) 주의 소도시 울름(Ulm)에 설립되었다.  설립 초기부터 현대 건축과 예술의 기틀을 마련한 바우하우스(Bauhaus, 1919-1933)의 계승을 이 대학의 핵심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1968년 바덴뷰르템베르크 주정부의 결정에 의하여 폐교될 때까지, 최초의 전문화된 현대 디자인 교육의 틀을 형성하고 현대 디자인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신화적인 디자인 전문교육기관으로 발전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울름조형대학이라는 신화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사회-문화적 시대상황 하에서, 바우하우스 전통의 계승을 추구함으로써 형성되고 발전된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1.1.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재건




제 2차 세계대전으로 패망한 독일은 국가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 Nazi 나치)의 정치와 군사 시스템이 해체되고, 미국과 소련의 주도하에 두개의 정치․경제  지역으로 나뉘어졌다.  이 시기는 궁핍과 급조의 시기로, 동․서 진영 양쪽  모두 일반적으로 빈곤한 경제살림이 지배적이었다.  물물교환과 암시장에 의해 정규의  물류공급이 대체되었다.  기초원료산업들과 사회기간시설들을 가능한 빨리 복구하여,  전쟁 폐기물로부터 생필품을  생산해내는 것이 시급한  당면 과제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산업시설들이 - 기존의 소유주들 내지는 대자본에 귀속되어있는  서쪽 진영에서는 불투명한 시장경제정책으로 인하여 - 복구되거나 사용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짐으로써, 전후 바로 이 시기의 산업생산성은 정체되거나  심지어는 감소되기까지 하였다.  반면  동쪽 진영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파괴가 서쪽 진영 보다 매우 심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산업생산성이 1948년에 이미 전쟁 이전의 수준까지 빠르게 성장하였다.




1947년 미국 대기업들의 집요한 압력에 의해, 결국 미국 외교정치의 전환과 냉전의 도입을 명백히 하는, 트루만 독트린(Truman Doctrine)이 선포되었다.  곧이어 마샬 플랜(Marshall Plan)이 발표되었다.  이는 미 달러화를 기초로 단일화된 소비세계 형성을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세계경제체제를 추구하였다.  여기에서 "마샬 원조(Marshall-Hilfe)"는 그 원조를 받는 국가들에 미국의 영향력을 근본적으로 강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1947년 11월  마샬은 "유럽의 재건은 독일의 재건 여하에 달려있다"라고 공표하였다.  즉, 이러한 미국의 외교정치노선에 따라 서쪽 진영을 공산주의에 대치하는 효과적인 "전선(Front)"으로 바꾸어놓겠다는 말이었다.  마샬 플랜에 의하여 1948년 4월 서쪽 진영들의 대단위 재건사업을 위한 첫 번째 신용대출 조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1948년 6월  20일 서쪽 진영을 하나의 경제단위로 통합함으로써, 동시에 동쪽 진영과 경제적으로 단절시키는 화폐개혁이 이루어졌다.  소련과 동구진영에 대치하는 경제 및 도덕적 "전선" 구축을 위한 서쪽 진영들에서의 마샬 플랜과 그에 따른 화폐개혁으로, 중공업 산업은 급속히 복구되어 갔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나치청산의 조처들은 지연되고, 결국 모두 중단되었다.  전후 법정에서 전쟁주범으로 선고받았던 정치 및 경제지도자 그리고 대자본가들은 다시 자유롭게 거리로 나오게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전후 기층민들로부터 나타난 반나치운동을 이어받은 지속적인 반파쇼-반자본주의 활동들은 억압되고, CIA 지원 하의 민주주의 재교육 프로그램을 통하여 소멸되어갔다.  이로서 1949년 5월 서독정부의 설립에서 서쪽 진영의 사람들이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준비되어졌다.  그리고 공산민주당(KPD)을 제외한 서독의 모든 정당들이 미국의 주도하에 반공의 "요새"로서 지지되었다.  1949년 8월 14일 초대 연방의회선거에서 기독교민주당(CDU)이 139석(31.0%)을 차지하여 최대 다수당이 되었다.  사회민주당(SPD)은 131석(29.2%), 자유민주당(FDP)은 52석(11.9%) 그리고 공산민주당(KPD)은 15석(5.7%)의 지지를 얻었다.  이 선거에서 선출된 연방의회의원들의 48.7% 에 달하는, 164명이 예전의 나치들이었다.  1949년 9월 14일 콘라트 아데나우어(Konrad Adenauer)는 서독의 초대수상이 되었다.   그는 대단위의 경제정치연합을 구성하고 사회시장경제(soziale Marktwirtschaft)의 주창자인 루드비히 에어하르트(Ludwig Erhard)를  경제장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모두를 위한 복지(Wohlstands f웦 alle)"라는 구호 하에 이른바 사회시장경제가 도입되었다. 




마샬 플랜의 진행과 위로부터 추진된 사회시장경제적 정책지원에  힘입어 경제는 급속도로 회복되고 확장되어, 1950년에 이미 전쟁 이전 제 3  제국의 생산성 수준에 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의 발발이 시장 경제적인 관점에 따라 곧바로 전세계적인 투자  붐을 일으킴으로써, 1952년부터 서독의 무역수지는 흑자로 돌아섰다.  매년  경제성장률은 급증했고, 실업은 사라지고 점차 완전고용으로 바뀌었다.  1950년에서부터 1960년 사이에 총국민생산은 세배로 증가했고, 국민주택이  3백만 채나 건설되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생산된 것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냉장고, 세탁기, 청소기, 가스 렌지  등이 생산되어졌다.  이러한 급속한 경제성장은 1960년에 이미 서독을 자본주의 세계에서 미국 다음의 산업생산국으로 만들었고, 1961년에는 세계 제 1위의 자동차 수출국으로  끌어올렸다.  이와 동시에, 서독 경제기적의 전 과정을 통하여 일련의 폭력적인 생산수단 독점화가 이루어졌다.  독일의  일반소비자들은 미국화된 소비사회로 전향되었다.  그 속에서 어느 정도의 사회적 이동은 있었으나,  새로이 수평적으로 평준화된 중간계층이 형성되고 점차 확산되어갔다.




이 시기는 단지 경제기적의 시기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는 또한 구세력 재건의 시기였다.  그리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토대로 냉전을 주도하는 미국에 의해서 서독의 재무장이 이루어지는 시기였다.  서방세계에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의 도발로 설명되어진 한국전쟁은 서독정부에게 재무장을 공공연하게 요구할 수 있는 호기가 되었다.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군에게 중국을 잃어버린 후, 서방세계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존재에 대해 더욱 날카로운 히스테리적 반응들을 보였다.  1956년 8월 17일 칼스루에(Karlsruhe)의 서독연방헌법재판소는 공산당을 금지하였다.  또한 미국 외교정책에 따라 서독인들을 자유언론으로부터 보호하고자, 방송과 신문들은 보도지침을 받고 검열되었다.  정치-사회적 참여의식을 갖고있는 사람들의 의식과 사상은 억압되고, 일반대중으로의 실천적인 길이  단절되었다.  반면에 CIA로부터 지원 받는 잡지와 방송국, 그리고 수많은 기독교 보수파와 우익 자유주의의 출판물에서는 미국을 자유민주주의 낙원으로 찬양하고 특히 반공의 냉전 이데올로기를 강하게 선전하였다. 






1.2. 재건기의 일상생활과 문화




서독 재건의 시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운 출발을 희망하였다.  극우 나치시대와 같은 예전 사회구조의 재건이 아니라, 보다 낳은 새로운 사회건설과 전쟁 없는 삶을 꿈꾸었다.   그러나 서독의 재건은 미국의 헤게모니 하에서 제시되는 방향으로 이끌어졌다.  "모두를 위한 복지"라는 구호와 함께 미국 중심의 시장경제가 도입되고, 사람들은 갈수록 소비-레저사회의 특성에 몰입해 갔다.  그 반면에, 냉전  이데올로기의 대량 확산과 핵무기 경쟁이  시작되었다.  이로부터 보다 낳은 삶에 대한 희망과 핵폭탄에 의한 제 3차 대전에 대한 공포라는, 시대 모순적 생활감정이 이 시기를 대표하였다.  이러한 공포는 심리적 냉전유도를 위해 이용되고, 소련과 동구권에 대한 증오로 부추겨졌다.  그 결과 일상생활에서는 그 어떠한 사회비판적 의견이든지 모두 배척되고, 단지 당시에 시작되는 복지생활에만 몰두함으로써, 미국의 자유주의 우상화가 저항없이 전개되었다.




점점 더 많은 가정들이 거실과 침실이 분리되어 있는 개인주택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점점 더 많은 가전기기들이 가사활동에 사용되어졌다.   자동차는 이제 더이상 호화스러운 사치품이 아닌, 필수적인 개인교통수단이 되어갔다.  사람들은 예전에 없었던 풍요를 누리면서, 더욱 더 강하게 미국화된 소비-레저사회 안으로 빠져들었다.  사회적 계급화 내지는 폭력적으로 급증하는 독점화 등과 같은 것들은 비계급적으로 해방된 소비-레져사회에 대한 선전의 뒷전에서 잊혀져갔다.  사람들은 항상 미국 중심적인 소비사회와 자유시장경제가 단지 장점만 있고 단점은 없는 것이기를 바랬다.  이제 사람들은 미국화된 소비문화 속에서, 모두 돈만을 벌기에 열중하고, 그 벌은 것을 갖고서 소비하는 생활을 즐겼다.  점점 더 많은 소비제품들이 누구나 이룰 수 있는 일반적 품목들로 되어 감으로써, 새로운 복지생활이 발전되었다.  이로부터 다양한 소비물결이 나타났다:  처음 50년대 초 음식-음주소비물결을 시작으로,  그후 가구소비, 여행 그리고 자동차소비물결이 차례로 뒤이어 일어났다.  노동시간의 단축에 따라 새로이 형성된 소비사회는 급속히 소비-레저사회로 발전되어 갔다.  새로이 성취한 여가시간은 물질적, 성적 자아실현의 자유영역으로서, 그리고 이동성은 새로운 현대적 시민의 자유로서 이해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현대성, 새로운 역동성 그리고 새로운 현대적 미에 대한 낙천적인 감정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생활감정의 내면에 유행을 따르는 것에 대한 고조된 의미가 자리잡았다.  유행을 추구하는 삶은 단지 크리스띠앙 디오르(Christian Dior)의 여성패션 "뉴룩(New Look)"과 같은 의류분야에서만이 아니라, 유행을 따르는 디자인 모든 분야에서 소비를 위하여 한결같이 제시되는 목표였다:  집안용품들의 새로운 형태, 가전기기, 가구 그리고 자동차 등.  콩팥탁자(Nierentisch), 봉투 형태의 조명등(T웪enlampe), 나비안경, 스쿠터(Scooter), 꼬리날개를 달은 유선형 자동차 그리고 베를린 의사당과 같이 생기있는 곡선적 건축 등이 당시의 조형양식을 특징지었다.  이같은 류의 양식들은 젊고 율동적이고 자유롭고 우아하며 억압되지 않은 것들의 표현으로 나타났다.  더  나아가, 강렬한 색상과 율동적인 형상부여로써, 무엇보다 거침없는 자유스러움과 경제성장 그리고 새로운 세계개방의 양식으로 선전되어졌다.   "시대의식(Zeitbewu쬽)"에 대한 한결같은 열망은 미국 낙원에서 건너온 훌라후프, 팝댄스, 히트송, 재즈, 미국식의 새로운 파티 등을 선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럭키스트라이크(Lucky Strike), 코카콜라, 리글리스(Wrigley's)껌은 현대생활의 상징으로 정의되었다.  십대 소녀들에게 페티코트(Petty Coat)와 뾰족구두가 유행되었고, 청년들에게는 새로운 시민의 자유를 상징하는 청바지가 인기를 끌었다.  이 당시에 정치-경제적 문제들은 대부분 간과되고, 오로지 소비사회의 복지생활에 대한 선전들만이 지배적이었다.




"소비는 자유롭게 한다(Konsum macht frei)"라는 표어를 중심으로 자본주의 시장은 전세계적으로 단일화되고, 서독의 일상생활 형태 역시 새로운 소비문화로 다양하게 바뀌어갔다:  소가족은 이상적 삶의 형태로 이해되고, 시민생활은 더욱 개인주의화되며, 생활주변으로부터 소외되어 일률적인 대량소비사회 안에서 익명화되었다.  새로이 형성된 자유로운 중간계층들은 계속 더 확대되고 평준화되었다.  이러한 사회에서도 여성의 역할은 가사전담과 자녀양육 그리고 교회의 봉사활동에  한정되었다.  여성들은 가정과 집안 꾸미기 및 그 관리에 종사해야했다.   이 시기의 가정주부들에게 있어서는 현대적으로 완벽하게 집안을 꾸미는 것이 자기를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러한 틈새를 산업체에서는 새로운 전기기술로 개발된 최신의 현대적 가전기기의 판매를 위해 최대한 이용하였다.  따라서 가사노동을 줄이고 편리하다고 선전하는 세탁기와 청소기 그리고 조리 기기 들과 기타 여러 가지들을 갖추는 것이, 기혼 남자들의 구매관심의 중점이 되었다.  또한 헤어드라이어와 전기면도기와 같은  위생 기기나 라디오와 텔레비전 같은 여가용 기기 들의 수요 또한 급격히 증가되었다.  가전기기들은 이제 더이상 호화로운 것이 아니었으며, 급속한 기술의 발달에 따라 가전기기들은 급속히 수백의 다양한 품목들로 확대되었다.




아직도 수평적으로 평준화되지 않은 계급사회 안에 사회적 권위욕구를 두고 있던 상류층은 새로운 계급의식의 과시문화를 형성하였다.  이들 상류층은 부(富) 와 이에 상응하는 새로운 생활방식을 통해서 다른 계층과 구별짓고자 "모던" 성향을 고집하고, 당시 엘리트 고급예술로 추앙받는 추상미술사조 및 이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국제적으로 유행되는 유기적 양식(Organic Style)에 매료되었다.  여기에서 미국의 유기적 디자인(Organic Design)과 유선형(Streamline) 스타일링은 최신 유행의 "모던" 성향을 대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들 상류층의 문화는 경제발전으로 상승된 부(富)의 과시욕구를 충족시키고자하는, 계속 확대되는 자유로운 중간계층들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모방되었다.  따라서  상류층은 그들의 신분을 나타내보이기 위해서, 항상 최신 유행 내지는 서방세계의 "멋(chic)"을 선호하였다.  그 결과, 지속적인 유행의 급속한 변화만을 고집하는 소비주의의 "모던"은 더욱 넓은 계층들에서 선호되고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최신 유행을 따르는 "모던"의 원칙은 당시 생활양식의 전제조건이 되었다.   이에 따라 디자인과 패션에서 유행을 선도하는 다양한 "모던"양식의 방향들이 이끌어졌다.






1.3. 디자인 진흥정책 및 협회의 발전




그러나 유행에 기초한 외형중심적인 미국식 스타일링으로는 세계시장에서 제품의 경쟁력을 향상시키기에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세계시장에서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국가적 차원에서의 수출진흥정책의 일환으로서 디자인의 개발이 대두되었다.  우선 수출증대에 대한 관심 속에서 디자인은 상품의 질을 규정 짓는 요소로서, 그리고 판매증진의 수단으로서 이해되어졌다.  여기에서 디자인의 개발이 산업적 대량생산 기술개발과 연관된  것으로서, 과학기술의 발전적 진보와 함께 제품의 조형적 개선이라는 관점 하에 강하게 요구되었다.   따라서 산업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디자이너 양성을 위한 교육이 새로이 개편되고, 그 당시 재형성되고있던 독일공작연맹(der Deutsche Werkbund)과  같은 디자인 단체들이 세계시장을 기초로하는 경제확장에 부합되도록 정치적으로 재편성되었다. 


       


1951년 4월 4일 디자인 진흥을 위한 법인재단으로서 디자인심의회(Rat f웦 Formgebung)가 발족되었다.  여기에서 이미 굿 디자인 제품들의 선정과 전시에 대한 생각을 기초로 디자인센터 슈투트가르트(Design Center Stuttgart)가 설립되고, 매년 "독일의 우수선정품(Deutscher Auswahl)"을 통하여 서독 제품의 디자인 수준을 알렸다.  당시에 구성된 또다른 디자인 협회로서, 1951년 쾰른 지역의 독일산업연방연맹(Bundesverband der Deutschen Industrie e.V. Koeln)에서 산업디자인노동연합(Arbeitskreis f웦 industrielle Formgebung)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1953년부터 매년 "좋은 산업형태(Die gute Industrie Form)"를 하노버산업박람회(Industriemesse Hannover)의 특별전시로 개최하여 왔다.   또한 1952년에 다름슈타트(Darmstadt)에 신기술형태연구소(Institut f웦 neue technische Form)가 설립되고, 프랑크푸르트박람회 조직위원회의 위탁을 받아 이 박람회의 특별전시 "잘 조형된 산업결과(gut geformter Industrieerzeugnisse)"의 큐레이터로서 전시를 주관해왔다.  1954년에는 에센산업형태연구소(Haus Industrieform Essen)가 설립되고, 1959년에는 독일산업디자이너협회(Verband Deutscher Industriedesigner  e.V., VDID)가 결성되었다.   이 협회들 모두 산업의 총체적 이익에 긴밀한 관계를 갖았다.  따라서 "좋은 형태(Gute Form)"는  산업체의 판매보장 수단으로서 자리를 잡게되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디자이너 교육의 질적 향상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고, 결국 울름조형대학의 건립을 위한 하나의 필수적인 바탕이 되었다. 






1.4. 울름조형대학의 발전배경과 발전과정의 분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서독의 경제성장과 그에  따른 국가 정책적 수출개발이라는 상황하에서 주도된 디자인 진흥정책에 힘입어, 울름조형대학은 1955년 10월 2일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그리고 막스 빌(Max Bill)을 초대학장으로 하여, 조형전공분야에서 혁신적인 교육과 연구들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발전되었으나, 바덴뷰르템베르크주의회의 결정에  따라 1968년 9월 문을  닫게되었다.  울름조형대학은 그 설립시기에서부터 문을 닫게 될 때까지 하나의 객관화된 조형과학의 개발에 일관된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발전의 단계별 과정을 보이는 그 어떠한 시기적 구분도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대학의 발전과정 분석을 위하여 편의상, 주도적 영향을 끼쳤던 인물을 중심으로 나타난 디자인관과 이념의 변화-발전에 촛점을 맞추어, 다음과 같이 세 시기로 분류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제 1기: 숄 자매 재단에 의한 설립(1947-1953)


제 2기: 막스 빌 시대(1953-1958)


제 3기: 조형학과목의 과학화 (1958-1968)


2. 숄자매재단에 의한 설립(1947-1953)




2.1. 숄자매대학의 설립이념




울름조형대학의 설립이념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전후 독일의 시대적 상황 하에서, 오랜 기간 동안의 준비과정을 거쳐 계획되고 실현되어졌다.  1947년에 이미 울름시민대학(Volkshochschule Ulm)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초기의 대학설립개념들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울름시민대학의 설립자인 잉에 숄(Inge Scholl), 한스 베르너 리히터(Hans  Werner Richter) 그리고 오틀 아이혀(Otl Aicher) 들은 가칭 "숄자매대학 (Geschwister-Scholl-Hochschule)"이라는 이름 하에 새로운 형태의 대학설립에 대한 생각을 전개시켰다.  이들은 나치치하에서부터 연연이 이어져 온반파쇼운동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국가로부터 뿐만 아니라  여느 정치단체 또는 종교단체로부터도 완전히 독립적이고, 나치에 의해 희생된 한스 숄(Hans Scholl)과 소피 숄(Sophie Scholl)을 기리는 대학을 울름에 설립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전후 서독에서 재건되는 국수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정치세력들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고자, 민주사회의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새로운 출발을 주도해나갈 수 있는 일련의 새로운 민주주의 엘리트 양성을 계획하였다.  따라서 "숄자매대학"은 개발초기부터 울름시민대학의 경험을 바탕으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정치, 과학, 예술 그리고 경제분야의 학교로서 설정되었다.




1950년 초 미 군정부, 즉 미 고등 고문관 맥클로이(John McCloy)로부터 대학설립을 위한 경제적 지원을 제안받았다. 여기에서 대학설립에 필요한 자금의 반을 미 군정부의 재교육기금(Re-Education-Fonds)에서 기부형식으로 제공받기로 이야기되었다.  미 군정부가 이 대학의 설립에 대해 갖았던 이러한 관심의 내면에는, 무엇보다도 미국 헤게모니 하의 민주화로 소위 반공을 기초로한 서방 자유세계를 건설한다는, 재교육정책의 속셈이 깔려있었다.  이로서 동베를린(Ost-Berlin)의 훔볼트대학(Humboldt Universit둻)을 견제하기 위하여 서베를린(West-Berlin)에 베를린자유대학(Freie Universit둻 Berlin)을 설립한 것과 같이, 미 군정부는 "숄자매대학"의 설립계획에 깊이 관여하고, 대학설립계획의 조속한 실행을 재촉하였다.






2.2. 울름조형대학 설립계획과 숄자매재단




뮨헨(M웢chen)에서 그래픽을 전공한 그래픽디자이너 오틀 아이혀의 추천으로, 1927년부터 1929년 사이에 바우하우스 데사우(Bauhaus Dessau)에서 공부하였던 화가, 조각가, 건축가이며 디자이너인 스위스인 막스 빌(Max Bill)이 대학설립계획에 동참하게되었다.  바우하우스를 계승하는 대학설립에 오랜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는 "숄자매대학" 설립위원으로의 제의를 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곧 1950년 일년 사이에 대학설립계획과 대학건축 프로젝트를 주도해나가는 중심인물로 자리잡게 되었다.  따라서 대학설립계획은 이제 막스 빌의 이상에 따라 바우하우스의 계승을 중심으로 전환되고, 건축과  산업디자인에 그 촛점이 모아지게 되었다.  그 결과, 정치적으로 설정되어진 "숄자매대학"의 설립이념은 "조형대학(Hochschule f웦 Gestaltung)"의 설립이념으로 대치되었다.  이러한 전환은 무엇보다도 독일정부기관과 소위  "좋은 형태(Gute Form)"를 지향하는 기업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관심 속에서 "숄자매재단(Geschwister-Scholl-Stiftung)"이 민사법상의 법인으로서 울름조형대학과 그에 귀속되는 연구소의 경제적, 법적 소유자로 설립되었다.  "숄자매재단"의 재정적 후원자 대부분은 정부기관과 기업들로, 이들의 관심과 이익을 위한 방향에 따라 울름조형대학은 재단법 조항의 테두리 안에  묶이게 되었다.  또한 울름조형대학의 운영에 있어서도, 재단법인은 명백하게 대학행정과 산학협동의 제반사항들에 대한 권한을 갖게 되었다.  이로서 울름조형대학은 그후 이른바 선택의 "자유"에 대한 필수불가결의 대가를 치러야만 하게 되었다.






2.3. 바우하우스 계승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전후 미 달러화를 기초로 단일화된 세계시장경제 안으로의 편입과 미국의 냉전 이데올로기의 확산 하에서 진행된 "공산주의자 사냥"이라는 시대적 상황은 반파쇼의 설립이념을 더이상 지속시킬 수 없게 만들었다.  바우하우스는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대적 상황 하에서 사회적으로 통합된 이상적 공산-사회주의 예술을 추구함으로써, 반나치 활동으로 낙인찍히고 처단되었다.   이러한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이 시기에 계승하려고 하자, 곧 공산주의자로 몰리게 되었다.  여기에서 막스 빌은 한편으로 바우하우스가 정치적으로 중립이었다고 해명하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으로 동기부여된  대학설립의 이념을 전환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오틀 아이혀를 중심으로 한 초기 대학설립준비위원들과 막스 빌 사이에서 공산주의자로의 매도설과 같은 극단적인 정치적 대립이 벌어졌다.  막스 빌은 멕클로이에게 전공학과목 교육 이외에, 자유시민적 소양을 갖추기 위한 교육적 방법 또한 힘쓰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제 막스 빌은 대학설립계획 전체 지휘권을 독점하여, 바우하우스 계승이라는 그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방향으로 이끌어 갔다.  그리고 발터 그로피우스와의 오랜 서신교환을  통해서, 바우하우스 교육이념을 따르는 교육 프로그램 설정에 힘썼다.  여기에서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 계승을 표방하는 여러 대학들 중 시카고의 디자인대학(Institute of Design)을 참고할만한 본보기로서 추천하였다. 




바우하우스는 30년대부터 미국에서 산업체의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수용되고 계승됨으로써, 미국의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1937년 모홀리 나기(Laszlo Moholy-Nagy)에 의해 바우하우스를 계승하는 시카고 뉴바우하우스(New Bauhaus Chicago)가 최초로 설립되었다.  이는 다시 1939년에 시카코 디자인학교(School of Design in Chicago)에 의해서 계승되고, 그후 1944년부터 디자인대학(Institute of Design)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바우하우스 본연의 사회혁명적인 이상은 상실되고, 단지 이윤극대화를 위해 산업에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표준화와 대량생산과 같은 형식적 수단만이 대두되고 계승되었다.  그 결과, 1955년 시카고의 디자인대학이 일리노이 공과대학(Illinois Institute of Technology, IIT)에 편입되면서부터 바우하우스의 유산들은 미국식 상업주의에 매몰되고 역사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냉전 이데올로기 하에서 재건되고 미국 중심의 세계경제체제에 편입된 서독의 사회적 상황 속에서도 역시, 모홀리 나기나 알베르스(Josef Albers)가 바우하우스에 남긴 "사회적 동기(soziale Motive)"들을 대부분의 새로운 조형기초과정에서 단지 개인주의적인 창조적 가능성들 내지는 형태미적 기초과정의 자유로운 전개의 목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막스 빌의 바우하우스를 계승하고자 하는 교육 프로그램 역시 이러한 맥락 속에 놓여있었다.





2.4. 막스 빌의 현대예술 중심적 관점




막스 빌은 현대예술을 시대정신(Zeitgeist)의 가장 순수한  표현형태로서 이해하고, 이러한 현대예술의 영향 하에 있는 새로운 형태의 디자이너를 고찰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예술을 삶의 가장 최상의 표현단계로서 주의 깊게  관찰하고, 삶을 예술품으로서 승화시키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는 헨리 판 데르 펠데(Henry van der Velde)가 그의 시대에 역설한 - 추한 것에 대항하여 싸우고 美의 도움으로 선을 실천하는 - 것을 행하여야 한다.  바우하우스 또한 판 데르 펠데의 바이마르 공예학교(Kunstgewerbeschule Weimar)의 후신으로서, 바이마르 공예학교와 같은 목표를 추구하였다." (2)




막스 빌은  순수예술(freie Kunst, 자유예술)을 모든 창조적 조형예술들의 척도로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우하우스에서의 대표적 특징을 진정으로 진보한 예술을 이루어내고, 이 예술을 건축과 산업디자인 그리고 그  밖의 조형학과에 적용시킨 것으로 이해하였다.




막스 빌은 그가 "소통(communication)"으로 분류하는 보도(presse), 정보(information), 광고(advertising) 등과 같은 그래픽전공분야보다 '생산(production)'으로 분류하는 건축, 도시건축, 제품디자인 등과 같은 전공분야 들을 중요하게 부각시키고, 이에 따라 교과목 분류등급을 재조정하였다.  그는 이제 산업생산을 이 대학의 기본원칙이며 핵심인 것으로 규정하였고 울름조형대학에서는 기술과 산업을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는 기본토대로서 부각시켜야만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또한 바우하우스의 교육과 학습의 기본원칙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였다:


"예술과 기술은 하나로 통일되어야 하고, 예술적 재능을 갖춘 사람은 주어진 기술-경제적 상황을 기본토대로 활용하여, 인류사회에서의 사용을 지향하는 일상사물들에서부터 건축에 이르기까지 의미 있고 합목적적이며 또한 아름답게 조형(造形)하여야 한다."(3) 




이러한 하나의 예술적인 관점에서부터 기술-경제적인 관점에 이르기까지의 예술과 기술의 통합이라는 명제 하에, 막스 빌은 "좋은 형태"의 문제 역시 대량생산에 대한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1949년에 "좋은 형태"의 조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충족되어야 하는 기능들의 총체적인 것은 조화를 이루는 전체로 조형(造形)되어야 하고, 이로서 美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는 총체적 이미지를 일깨워야 한다."(4)




그리고 그는 기계를 예술가에게 있어 가장 값진 도구이자 또한 예술창작활동의 대상물로 보았다.  따라서 예술과 산업 사이의 괴리현상은 美적인 문제로서, 새로운 현대적 美 개념의 개발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고전기능주의에서 나타난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는 교조적 형식을 비판하고, 美 기능의 필연성에 대하여 역설하였다:


"대량생산되는 소비제품은 단순히 그 기능을 통해서 나타나는 상대적인 美가 아니라, 美 그 자체가 기능이 되도록 조형되어야 한다."(5)






2.5. 기초과정 중심의 조형대학 교육프로그램




막스 빌은 그의 이러한 美 개념에 기초한 현대예술 중심적 맥락 속에서, 기초과정을 울름조형대학 교육프로그램의 핵심으로 설정하였다.  기초과정 및 그 심화과정에서의 교육방법은 형태론(Formlehre), 색채론(Farblehre), 그리고 조형론(Gestaltungslehre) 안에서 개념지었다.  그리고 시카고 디자인대학(Institute of Design)의 오랜기간에 걸친 바우하우스 계승과정을 조사하여, 이를 본보기로 삼아 학생들의 자발적인 교육활동을 이끌어주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의 건전한 교육을 목표로 설정하고, 기초과정과 제품형태(Produktform), 건축(Architektur), 도시건축(Stadtbau), 시각소통(visuelle Kommunikation), 정보(Information) 등 5개의 전공학과를 이루는 교육프로그램을 완성하였다.  그 결과, 이러한 교육목표와 프로그램은 1948년 시카고 디자인대학의 그것과 매우 근접한 유사성을 보이게 되었다.(6)






2.6. 울름조형대학 건축




1949년 말 오틀 아이혀는 대학건축의 설계개념을 개발하였다.  이 설계개념에서 건물들과 내부공간들은 기능-계통적 구성을 통하여, 내적 측면에서는 교육적 작용을 그리고 외적 측면에서는 대학의 설립이념을 표출시키는 것을 중심으로 제안하였다.  이러한 아이혀의 건축 설계개념은 정치적 상징기능을 매우 중요하게 부각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막스 빌은 아이혀의 정치적 상징성을 중심으로 진행된 건축 설계개념에 반대하고, 분할된 건물 구조 안에 다양한 각각의 기능들을 배치 구성하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그는 대학의 모든 교직원과 학생들의 공동체 개념을 설계에 도입하여, 강의실과 실습실 그리고 후생복지시설들이 한곳에 집중된, 캠퍼스와 같은 종합적 복합단지를 개발하고자 노력하였다.  여기에서 막스 빌 역시, 발터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 데사우의 건축설계에서 사용하였던 - "각각의 다양한 기능들에 따라 건물들이 서로 분리되지만, 서로 연결된 건물구조를 통하여 하나의 단지를 이루는"(7) - 원리를 그대로 따랐다.  이로서 바우하우스 데사우와 동일한 개념을 갖는 울름조형대학 건물의 건축시공이 1953년 2월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대학건물의 건축과정에서, 건물과 그 안의 모든 시설물들은 하나의 실습교육의 대상으로 계획되고, 디자인되고, 생산되어졌다.






3. 막스 빌 시대(1953-1958)




1953년 8월부터 울름조형대학에서의 첫학기 기초과정이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울름조형대학 스스로 내건 가장 중요한 설립동기는 "바우하우스의 계승"이라는 슬로건이었다.  초대 학장 막스 빌은 미 고등 고문관 맥클로이와 숄자매재단에 "바우하우스의 계승"에서 "정치적 중립"을 지킬 것을 약속하고, 울름조형대학 설립의 근간을 이루어온 정치적 이념을 억압하였다.  그는 또한 예술가들이 시장경제의  발달에 따라 사회에서 불필요한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계층의 일원으로 전락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디자인에서 순수예술이 최우선된다는 그의 견해를 지속적으로 펼쳐나갔다.  그리고 그의 "예술가의 존재에 대한 표현"을 통해서, 헨리 판 데르 펠데의 "예술가-디자인(K웢stler-Gestaltung)" 관점을 부각시켜 받아들였다.




3.1. 막스 빌과 젊은 강사들 사이의 이념적 갈등




그러나 오틀 아이혀, 토마스 말도나도(Thomas Maldonado), 한스 구겔로(Hans Gugelot)와 같은 젊은 강사들은 처음부터 막스 빌의 "예술가-디자인"의 관점에 반대하였다.  정치적으로 좌익성향의 바우하우스 당시의 사람들과는 달리, 이들은 "環境의 人本化(Humanisierung der  Umwelt)"를 향한 진보적 이념에 대한 실천적 의무감을 갖았다.  토마스 말도나도는 그 후 베를린 국제디자인센터(IDZ Berlin)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서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우리 강사들은 산업사회에서 디자인의 역할에 대해 너무 낙관적으로 바라보았다.  우리의 합리주의는 낙천적인 것이었지, 결코 비판적인 합리주의가 아니었다.  우리는 예술가(K웢stler)로 취급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며, 더구나 (처세술에 능한) 생활예술가(Lebensk웢stler)는 더더욱 아니었다."(8)




이들 젊은 강사들은 "좋은 형태"로써 물질적 일정 생활수준을 이루어내고자 하였다.  그 과정에서, 산업사회에 적합하게 합리화된 새로운 표준원칙을 교육방법과 생산세계에 도입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바우하우스의 기본이념을 울름조형대학에 계승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막스 빌과 젊은 강사들 사이의 갈등은 새로운 과학적인 학과목의 도입을 통하여 더욱 심화되어 갔다.  이러한 사실을 접한 발터 그로피우스는 막스 빌의 지도 하에 있는 울름조형대학은 바우하우스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헨리 판 데르 펠데의  공예학교를 계승한 것이라는 그의 생각을 서신으로 전하였다.  그리고 막스 빌이 책임과 의무를 지고 있다고 느끼는 학교는 바우하우스와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르다고 언급하였다.  여기에서 바우하우스가 하나의 객관적인 조형과학을 개발하려고 노력할 때, 판 데르 펠데는 선생의 주관적인 견해를 학생들에게 강요하였다고 설명하였다.(9)




막스 빌은 오틀 아이혀, 한스 구겔로, 토마스 말도나도와 같은 젊은 강사들과의 디자인 이론적 갈등으로 인하여, 1955년에 학장직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는 토마스 말도나도를 학장대임으로 임명하였다.  오틀 아이혀, 한스 구겔로 그리고 프리드리히 포르뎀베르게-길데바르트(Friedrich Vordemberge-Gildewart)는 학과장단원이 되었다.  막스 빌은 결국 1957년 3월 울름조형대학을 떠났다.  막스 빌과 토마스 말도나도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의 결정적 원인은 디자인과 예술의 관계에 대한 견해차이였다.






3.2. 막스 빌의 예술가 디자인




막스 빌은 예술가로서의 디자이너를 주장하였다.  그의 근본적인 관심사는 사물의 형태에 있었다.  디자이너는 일상생활의 수준향상을 위하여 아름답고 완벽한 사물들을 디자인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형태를 제공하는 것은 시대의 흐름을 가장 순수하고 명확하게 표현하는 현대예술이었다.  따라서 새로운 형태의 디자이너는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현대예술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디자인에서의 진보는 사물의 형태로 시대정신을 표출해내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에 따라서막스 빌은 제품디자이너를 사회계몽가로 보았다.  즉, 제품디자이너의 창작물들은 산업생산물들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좋은 형태"라는 우수디자인 선정을 통해서, 사람들은 이와 같은 본보기를 이루어내고자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우수디자인은 시장에서 경쟁우위를 만들어줌으로써, 여타 생산업체들이 따라하도록 자극시킬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막스 빌이 생각하는 디자인교육의 중심은 美의 훈련이었다.  그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디자인 능력은 - 추상적으로 표현된 과제에서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실제 사물과 같은 것에서도 역시 - 美적 훈련을 통해서만 습득될 수 있다."(10)






3.3. 바우하우스 이념의 계승 - 환경디자인




아르헨티나의 사회주의 화가이자 언론가인 토마스 말도나도는 예술만의 고유한 기능을 인간정신의 해방을 촉구하는 것에서 바라보았다.  그는 1954년 울름조형대학에 부임하여, 기초과정과 시각소통(Vusuelle Kommunikation)학부 강의를 책임졌다.  그는 울름조형대학이 추구하는 바우하우스 계승에 대하여, 바우하우스 당시의 역사적 현실의 상황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였다.  그 답은, 오로지 바우하우스 계승자의 관점 뿐만 아니라, 이를 사회적 영역으로 확장하여, 사회적 발전과정과 과학-기술적 변화들의 상호작용에 대한 모든 관계를 사회적 영역에서의 "환경디자인(Umweltgestaltung)"으로 읽어낸 것이었다.  말도나도에게 있어서 현실적으로 시급한 것은 바우하우스 교육학의 답습이 아니라, 바우하우스의 진보적이고 독창적인 행동양식과 교육이념이었다.  즉, 각기 고유한 역사적 상황 하에서 사회발전에 기여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바로 바우하우스 계승의 핵심이었다.  바우하우스 데사우를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 하에서 고찰하고, 데사우에서의 발전은 궁극적으로 울름조형대학이 따라야 할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울름조형대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라고 논하였다.  따라서 기초과정을 일반적인 바우하우스 교수법의 기본 축으로서 바라보고, 바우하우스 교육원리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특히, 바우하우스의 기초교육원리를 무엇보다도 제품디자이너의 교육프로그램에 도입시키는 것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로서 그는 예술가 양성의 관점에서 규정된 막스 빌의 제품디자이너 교육프로그램을 최우선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리고 제품디자이너의 교육프로그램은 새로이 형성되는 산업사회에서 과학-기술적인 학과목들과 폭넓게 학제간 관계를 갖아야 하는, 조형대학의 교육에서 가장 특수한 경우로 바라보았다.  이는 제품디자이너의 목표가, 과학지식과 그 결과들을 제품디자인이 더욱 발전되도록 적용시킬 수 있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제품을 보다 빠르게 시장에 출하시키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3.4. 토마스 말도나도의 산업디자인관




토마스 말도나도는 1958년 브류셀 국제박람회에서의 주제발표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산업디자인의 세 가지 관점, 즉 미적, 경제적, 공학적 관점을 제시하였다.  그 첫 번째 관점은 미적인 것, 즉 산업디자인과 예술과의 관계였다.  그는 우선 미적인 요소만이 산업디자이너 창작행위에서 고려되어지는 유일한 관점이라는 당시의 디자인관과, 미적인 요소가 가장 본질적인 것이라는 - 즉  산업디자인이 예술이라는 - 관념에 쌓여있는 당시의 산업디자인 계를 비판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산업디자인은 예술이 아니었다.  산업디자이너는 절대적으로 예술가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기에, 산업디자인을 예술로 보는 당시의 단편적인 편견에서 벗어나 - 구조설계적인 것, 경제적인 것, 생산적인 것, 그리고 한정된 범위 안에서의 상징적인 것 등과 같은 - 더욱 중요하고 지배적인 산업생산의 요소들을 기본적으로 고려해야만 한다고 역설하였다.  즉, 그에게 있어서 미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산업디자인 활동에서의 확고한 토대가 아니었다.




두 번째 관점으로 산업디자인의 경제적 역할을 분석하고, 여기에서 생산과 소비에 대한 산업디자인의 종속성을 해석하였다.  그래고르 파울손(Gregor Paulsson)의 한 이론에 따라, 생산업자가 관심을 갖는 측면에서 본다면, 미적인 요소는 상품교환가치의 획득을 위한 산업디자인의 최우선적인 관점이라고 전제하였다.  미적인 공허함 만을 불가피하게 이끌어 내는 "스타일링(Styling)"이 이러한  것에 대한 전형적인 예라고 보았다.  그리고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상반되는 가치개념으로 설정하는 이분법적 분리의 모순을 비판하고, 사용가치를 교환가치의 물적 토대로서 정의하였다.  이러한 정의에 기초하여, 우선 사용가치의 미적인 완성을 통해서 교환가치 향상의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현대적 산업디자이너의 역할에 대해서 막스 빌과는 반대로, 일련의 전문 공학 엔지니어들과 함께 최대 생산성 및 소비의 물적 그리고 문화적 최대 만족을 위한, 생산과 사용과정의 다양한 요구조건들을 총체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세 번째 관점은 공학적인 것으로서, 생산성과 산업디자인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과학과 기술 발전의 결과로서 대두되는 자동화의 요구들과, 이에 따라 변화되는 생산과정에서의 제품별 작업공정과 그 생산설비들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디자이너는 그의 고유한 전공영역 밖에 놓여있는 수많은 요구조건들을 고려해야만 한다고 역설하였다.






3.5. 과학 학과목의 도입




막스 빌과 토마스 말도나도를 중심으로 한 젊은 강사들 사이의 이와 같은 견해차이에 의하여 막스 빌이 학장직을 물러나는 1955년부터, 막스 빌에 의한 기초과정 중심의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는 바우하우스 교수법의 계승이 울름조형대학 설립계획 초기의 정치적 이념으로 재정립되는 바우하우스 이상의 계승으로 전환되기 시작하다.  또한 디자이너는 이제 더이상 예술가가 아니라, 전문 엔지니어로서 정의됨으로써, 디자이너 교육프로그램에 과학 학과목이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1955년 울름조형대학에서 처음으로 과학적 조작주의(Operationalismus)의 관점에 따른 이 대학 고유의 조형기초론이 개설되었다.  여기에서 전통적인 조형기초론으로 정립된 부분들을 지각이론,  조형이론, 대칭이론 그리고 위상기하학(Topology) 등의 기초이론들과 접목시키는 것이 시작되었다.  토마스 말도나도는 이러한 과학화를 갈수록 확대시키고, 교육프로그램에 더 많이 도입시켜나갔다.  그리고 디자이너가 현대적 생산과정에 성공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교과과정에 집약된 과학적 지식으로부터 습득되어지는 기술적 지식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1957/58년의 교육프로그램에 응용심리학과 생산기술 그리고 재료학 및 설계론이 도입되었다.  일반기계공학과 같은 이러한 전공과목들과 전공역사 및 사회학 세미나 등이 제품형태(Produktform), 건축(Architektur), 도시건축(Stadtbau) 등의 학과에서 요구되었다.  모든 전공분야에서 과학이론과 인식론의 기초를 다루기 시작하였다.  통합적 개념으로서의 방법론에서는 바이츠(Wolfgang Beitz)의 설계론, 즉 독일엔지니어협회-표준원칙(Verein der Deutschen Ingenieur, VDI-Richtlinie) 2221에서 제시하는 개념디자인(concept design, 혹은 개념설계) 및 시스템디자인(system design, 혹은 시스템 설계)의 방법론을 기초로 하여 논리학, 수학적 조작분석, 위상기하학 그리고 사회학 역시 도입되었다.  그리고 수학적 조작분석이란 개념을 가지고서 그룹이론,  집합이론, 통계학 그리고 수치해석 등을 종합적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교육프로그램의 과학화는 자연과학 보다는, 소통이론(science of communication), 사회학, 심리학 등과 같은 사회과학과 의미론(semiotics)과 같은 기초과학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과학화였다.  울름조형대학의 디자인교육은 이제 디자인 실습과정이 50%, 그리고 현대 과학이론이 50%로 구성되어졌다.  그리고 디자인 실무와 직접 연관되는 디자인 실습과 재료 연습과 같은 실습과목과 과학과목 들은 크게 다음과 같이 편성되었다:




실습과목:       - 디자인 실습, 공작실습(기계제도법 등)                  


        - 기술 및 공학(설계론, 방법론, 생산공학, 재료공학 등)    


        - 건축이론, 디자인이론          




과학과목:       - 기초과학(의미론, 정보이론 등)


        - 생물학, 생리학


        - 사회과학(경제학, 사회학, 심리학 등)


        - 역사과학(문화사 등) (11)






3.6. 울름조형대학의 디자인관




이와 같은 시대적 현대문화에 기술의 집약은 1955년부터 울름조형대학의 더욱 본질적인 목표가 되었다.  여기에서 "현대적 의식(zeitgem뒮es   Bewu쬽sein)"은 "문화적 의식(kulturellen Bewu쬽sein)"의 집약으로서 이해되고, "기술적 의식(technisches Bewu쬽sein)"으로 정의되었다.  "기술적 의식"의 특징은 울름조형대학의 제품형태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유닛시스템디자인(Baukasten-Systemdesign)이었다.  그  결과 제품형태 학과와 이와 결합되어 있는 "제품형태연구소(Institut f웦 Produktform)"는 울름조형대학의 중심학과로 부상되었다.  제품형태 학과에서의 교육목표는 산업생산되는 대량생산품의 디자이너로서, "좋은  형태" 들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즉, 기술적으로 완벽하고 사용에 합목적적이며 미적으로 또한 전혀 하자가 없는 생산품 디자인에 대한 사회적 의무를 갖는 디자이너의 교육을 책임지는 것이다.  따라서 울름조형대학의 디자인의 목표는 유행을 따르거나 새로운 장식적 효과를 불필요하게 실험하는 것 등을 배제하고,  객관적이며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디자인 해결안들을 개발해내는 것이었다.






4. 조형학과목들의 과학화(1958-1968)




4.1. "환경디자인" 개념




1960년대 초부터 디자인개발과 디자인교육이 고유한 전공분야로 인정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울름조형대학에서는 디자인을 더이상 응용미술로 생각하지 않았다.  과학 학과목들은 기본적이고 당연한  필수 교과과정의 한 부분으로 격상되었다.  교과과정에 자연과학과 공학, 정보이론(Informationtheorie), 인간공학, 사회학, 심리학, 조형이론적 기초를 체계적으로 학습하기 위한 조형실험, 디자인을 위하여 특별히 개발한 방법론 등이 도입되었다.  교육프로그램의 반 이상이 결국 디자인이론과 그에 따른 과학적 기초들로 이루어졌고, 여기에서 수학적 방법의 도입을 통하여 과학성의 실증작업이 뒤따랐다.  제품형태 학과의 중점은 디자인방법론으로부터의 디자인개발에 놓여있었다.  이 시기에 디자인방법론적 개념의   발전은 "환경디자인(Umweltgestaltung)"으로 특징지어진다.  유닛시스템디자인(Baukasten-Systemdesign)은 디자인 프로젝트의 전제조건이 되었고, 이는 다시 "환경디자인"의 개념 속에 통합되었다.  노르베르트 코렉(Norbert Korrek)에 따르면 이 "환경디자인"은 "사회와 개인의 발전을 위한 최적의 전제조건들의 창출을 목적으로, 인간환경의 모든 물적 그리고 기술적 요소들의 광범위한 사회적 통합을 이루어내는 디자인"(12)으로 정의된다. 






4.2. 기술교조주의의 발현




후기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 하에서 갈수록 더욱 독점화되어가는 산업의 그칠줄 모르는 생산확대에 따라 과잉소비사회가 도래하고, 환경의 파괴는 나날이 커져만 갔다.  이러한 상황은 울름조형대학에서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그리고 대학 내부에서 이 문제를 놓고 의견이 크게 두가지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한 그룹은 과장된 기술-과학적 희망 속에서 기술교조주의적 개념을 추구하였다.  다른 한 그룹은 사용가치를 높이고 반영구적인 제품을 개발함으로써, 낭비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과학화가 더욱 발전하는 동안 울름조형대학에서 과학기술에 바탕을 둔 디자인 강사들 그룹은 기술교조주의(Technizismus)를 주장하고 나왔다.




기술교조주의적 관념의 시작점은 다음과 같은 기술적 결정론이었다:


"기술세계는 운명적으로 인간에 대립한다.  생산의 기술적 합리성은 인간의 손 안에 있지만, 오로지 기술발전에 적응해 나가는 것만이 인간의 존재방법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는 즉, 기술은 그 사회적 연관관계들로부터 이탈되어 절대화되는 것이다."(13)




이러한 기술교조주의가 주로 지향하는 바는 산업생산과정의 기술적 그리고 도구적 조건들로써, 환경디자인의 미적 영역을 단편 일률적으로 제거해버리는 것이었다.  기술교조주의적 디자인의 개념은 기술-과학적 학과목을 통하여 올바른 디자인에 대한 증명 및 측정이 가능하다는 믿음으로 전개되었다.  즉, 객관화할 수 있도록 정확하게 정의된 판단기준들을 갖고서 이루어지는 논리적 결과를 통하여 디자인을 가능한 정량적으로 나타낼 수 있게함으로써, 디자인에서의 오류를 제거한다는 것이었다.






4.3. 기술교조주의 비판논쟁




이와 같은 과학적, 특히 수학적인 학과목의 과대평가는 이미 1958/59년 학기에서부터 사회학자 한노 케스팅(Hanno Kesting)과 수학자 호르스트 리텔(Horst Rittel)과 같은 강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기술교조주의를 신봉하는 디자인 강사들은 기술적으로 가능한 것들은 실현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표명되어진 진보에 대한 맹신적인 신뢰와 병행하여, 모든 전통적인 것에 대한 극단적인 반감이 표출되었다.  그러나 기술교조주의적 디자인의 개념들은 사물과 사용자의 관계나 또는 그 사이의 모순적 관계들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어내지 못하였다.  디자인에서의 기술-과학적 방법은 수학적 기법의 사용과 인간공학적 결과들의 사용과 같은 것들로 이해되고, 그 속에서 무분별한 기술교조주의적 몽상들을 결과 중심적으로 조작하여 증명해내고자 노력하였다.  디자인활동의 과도한 객관화로 치닫는 경향은 극에 달해 갔다.  결국 울름조형대학은 호르스트 리텔을 중심으로한 기술교조주의적 방법론자 그룹과 토마스 말도나도를 중심으로 한 그룹, 그리고 또 다른 한스 구겔로와 같은 실용주의적 디자이너 그룹으로 나뉘어지고, 그들 사이에서 디자인관에 대한 내부논쟁이 시작되었다. 



토마스 말도나도는 디자인교육에 과학기술적 발전의 결과들을 도입한 장본인이었으나, 기술적 발전에 대한 도를 지나친 과장된 믿음을 비판하고, 이를 경고하였다.  그는 한스 구겔로 그리고 오틀 아이혀와 함께 1960년 도쿄 세계디자인회의에서 창조적인 과학적 조작능력들의 도입을 통하여 창조적인 잠재적 재능들을 대치시켜야만 하는 필연성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객관적 방법들의 사용을 전제하였다.  객관적 방법들에서는 무엇보다도 정보를 수집하고 분류하고 해석하고 선택하고, 판단 및 결정을 준비하는 것 등을 가능하게 해주는 과학적 방법들을 우선 꼽았다.  그러나 말도나도는 이러한 과학적 방법들에 대한 과도한 믿음이나 나약한 숭배, 더 나아가서는 정해진 방법들의 사용이 자동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최고수준의 질을 이루는 독창적인 결과를 보장한다는 착각 등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그는 디자인교육을 위하여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지식의 의미를 높이 치켜세워야 하지만,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단지 정량적으로 분리하고 그 의미를 과장시켜 부풀리는 것과 같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4.4. "환경디자인"의 이상향




토마스 말도나도는 바우하우스 이념의 계승이란 관점 하에서 기술문명에 대한 인본주의적 시각을 자유로이 펼치고자, 즉 인간의 환경을 새로운 구체적인 디자인개발의 주된 영역으로 정립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1965년 "환경디자인"을 새로운 주된 목표로 설정하였다.  여기에서 디자이너와 건축가의 최우선 과제는 "인간의 환경에 구조와 형상의 부여"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말도나도는 모든 학교기관에서 사회적으로 종합되고 정립된 디자인 프로그램을 공동으로 개념화하고 실현되도록 노력함으써,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환경디자인"의 진흥에 전념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것은 단지 기능적인 사물들을 디자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환경의 구조와 형상을 인본주의적으로 바꾸어나가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환경디자인' 그 자체가 울름조형대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불변의 이상향이 되었다.






4.5. 한스 구겔로의 유닛시스템디자인




울름조형대학에서 추구하는 "환경디자인"의 개발은 한스 구겔로의 유닛시스템디자인을 기본토대로 하여 개념화되었다.  구겔로의 기본개념은 각각 다른 기능을 갖은 제품들을 더이상 개별적으로 제작하지 않고, 통일된 하나의 전체 유닛시스템 하에서 유닛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로 생산되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제품프로그램 종류를 다양하게 넓히면서, 동시에 다품종 생산에 따른 단위 생산량 감소에 대한 부담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는 발터 그로피우스가 규격화를 통하여 개개인들이 그들에게 잘 어울리는 모델들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더욱 풍부해지게 될 것이라고 이상적으로 생각하였던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후기산업사회의 생산관계 하에서 바우하우스 이상향의 구체적 실천방법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유닛시스템 디자인개념 하에서 구겔로가 최초로 개발한 대표적인 것은 스위스 가구회사 보핑어(Bofinger)를 위한 가구 프로그램 "M 125" 였다.  다양한 종류의 장과 그에 딸린 가구들의 시스템이 이른바 125mm 두께의 압축판 모듈로 구성되어졌다.  가구의 벽면을 이루는 각각의 요소들은 직각으로 규격화되고, 창고저장과 운송을 위하여 완전한 평면을 이루었다.  그리고 문과 장의 표면 등은 밝은 색의 플라스틱 표면처리를 하여 표면을 매우 밝게 함으로써, 값비싼 실내의 조명을 반사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4.6. 한스 구겔로의 디자인관




한스 구겔로에게 산업디자인은 우선 판매수단이 절대로 아니었다.  오히려 산업디자인을 필수적인 문화의 중심요소로 보았다.  그리고 산업디자이너를 소비자가 아닌, 사용자의 대변인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는 토마스 말도나도와 함께 무엇보다도 미국 "디트로이트 식"의 판매만을 위한 스타일링을  배격하였다.  그리고 가능한 가장 합리적으로 디자인 된 인공(k웢stlich, artificial)의 환경 만이 영구적이고 가치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로부터, 제품형상의 진정한 향상 및 발전은 사용성과 생산기술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새로운 개발을 전제로 한다고 역설하였다.  구겔로에게 있어서 산업디자인 활동은 공학디자인(engineering design)에서와 같이, 새로운 해결안을 찾고, 새로운 원리가 특허로 인정되며, 그것이 제품에 적용되는 것 등과 동일한 것이었다.  따라서 산업디자이너로서 그의 작업방식은 필요성의 정확한 분석 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판단논리에 따르는 것으로 대표된다.  이러한 그의 디자인 방식은 - 조작과 작동 부분들을 수학적 질서와 상호관계를 이루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일시키고, 그 안에 조작버튼, 스케일, 활자, 틈새, 스피커 등 모든 요소들을 과학적으로 배치한 - 일명 "백설공주의 관(Schneewittchensarg)"이라 불리는 브라운 라디오-전축-콤비네이션 "SK4"에서 특히 가장 잘 나타난다. 




한스 구겔로는 산업디자이너를 하나의 전체 시스템에서 사용과 관계되는 영역들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일에 종사하는, 산업디자인 엔지니어로서 새로이 정의하였다.  여기에서 산업디자이너를 생산기술자들과의 협업을 통해서 산업의 생산계획과 생산공정에 참여하는 공학디자인 엔지니어나 생산 엔지니어와 동일한 하나의 전문 엔지니어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산계획은 한 제품의 생산에 관계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제품이 어떻게 사용되고 사람들의 생활환경 속에서 어떻게 위치 지어져야 하는지 또한 결정해야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디자이너는 사용가치를 향상시키고 생산비용을 줄이는데 그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로부터 산업디자이너의 업무과제는 물건의 사용가치를 증진시키는데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생산계획의 팀 작업에서 기능요소들 간의 연결구조와 그 구성에 대한 구조설계 능력 그리고 "인간-기계-관계(Human-Machine-Relation)"에 대한 전문성 등은, 제품의 최종적 구조를 결정하는 산업디자이너만의 유일한 고유의 영역이라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산업디자인은 인간과 제품과의 관계를 명확화하는 것이기에, 산업디자인에서 기술적 관점과 사회적인 관점은 서로 정확하게 대칭시켜져야 한다고 보았다.  구겔로는 인간이 그의 환경에서 이미 발견한 관계들은 또한 사물들 간의 관계라고 이해하고, 이러한 관계들은 한눈에 파악되는 공간 안에서 서로  다른 두 가지 사물이 상호 동일한 관계를 갖도록 디자인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무조건 기능적인 것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라, 또한 순수한 외형적인 것이기도 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구겔로의 디자인에서 추구하는 것은 문화적 그리고 사회적 관점 하에서 사회발전에 봉사하는 산업제품의 디자인이었다.  이와 같은 구겔로의 디자인관은 울름조형대학 "제품형태" 학과에서 추구하는 디자인, 즉 "환경디자인" 개념 하에서의 유닛시스템디자인의 기본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1962년 구겔로는 노이울름(Neu-Ulm)에 생산개발디자인연구소(Institut fuer Produktionsentwicklung und Design e.V.)를 설립하고, 그의 디자인관을 구체적으로 실현시켜 나감으로써, 독일 산업제품의 디자인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특히 1964년 지라르드스(Girards)사를 위해 개발한 래디얼 드릴링머신(radial drilling machine, Radialbohrmaschine)은 오늘날까지 산업내구제 디자인분야에서 대표적인 본보기가 되어왔다.  디자인을 통한 높은 경제성과 조작의 단순화의 실현 그리고 작업준비를 위한 소요시간의 단축 등을 이 공작기계 디자인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인간공학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기계조작을 위한 요소들을 사용의 전제건들에 따라 최적화하고 일목요연하게 배치함으로써, 기계조작을 위한 모든 요소들은 작업자 중심의 하나의 조작시스템으로 통합시킨 대표적인 디자인 개발사례이다.






4.7. "환경디자인"을 위한 디자인의 과학화




이 시기의 울름조형대학에서는 "환경디자인"이란 목표 하에 사이버네틱스의 도입을 중심으로, 과학화가 더욱 확대되어 갔다.  교육프로그램의 대부분은 이제 현대 과학이론교육에 집중되고, 사회과학은 전체 교육과정의 50%이상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환경디자인"을 목적으로 하는 과학적 디자인방법론의 발전을 위하여, 1964년부터 토마스 말도나도와 구이 본지페(Gui Bonsiepe)는 디자인에서 과학적 지식과 경험의 합리적 적용방법을 공동으로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디자인방법론은 산업디자인에 적합한 모든 과학적 방법의 계통적 분류 및 정리 그리고 이의 체계적인 적용방법에 대한 이론이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산업디자이너의 실제적인  디자인작업에 적용시킬 수 있도록 수학적 학과목들의 조작가능한 방법들을 연구하였다:


- 유닛시스템과 치수통합의 문제들을 위한 조합론(Kombinatorik)


- 연결구조와 격자구조의 디자인을 위한 대칭이론적 한 형태로서의 집합


  이론(Gruppentheorie)


- 변이와 변형의 수학적 조작을 위한 곡선이론(Kurventheorie)


- 규칙적인, 반규칙적인 그리고 비규칙적인 물체의 디자인을 위한 다면체


  기하학


- 배열, 연속성 그리고 연계성의 문제들의 해를 구하기 위한 위상기하학




토마스 말도나도와 구이 본지페는 미래에 디자이너의 기능을 시장경제원리에 의해 조장된 수요에 따르는 기존제품들의 디자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의 이익을 위하여 새로운 욕구와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제품을 이루어내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디자인을 인간환경의 개선에 봉사하는 구체적인 사물들과 제품들을 개발하는 과학적 활동으로 정의하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사회적 책임을 지는 디자이너의 의식을 강조하였다.  또한 디자이너의 기술-과학적 능력에 희망을 걸고, 디자이너는 사회의 통합자(Coordinator)로서 사회적 기본모순들을 과학적 인본주의로 극복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로부터 도시디자인(Urban Design), 건물디자인(Building Design), 지역공동사회디자인(Community  Design) 등은, 환경엔지니어(Umwelt-Ingenieur)로서의 이상적 표상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전형적인 산업디자인너의 주된 활동대상으로 간주되었다.  이제 디자이너는 개발과제 개념의 인본주의화, 고유한 사용특성 들의 개선, 저렴한 생산비용 그리고 다양한 욕구충족 등을 실현시키고자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 되었다.  여기에서 과학성에 대한 물음은 원리원칙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효율성에 대한 물음이었다.  이와 같은 환경디자인의 추구는 당시의 후기자본주의적 사회관계 하에서, 결국 산업디자이너 의식의 이데올로기화로 발전되었다.  그 결과, 서독 정부당국과 산업체들에서는 울름조형대학의 이러한 경향을 그들의 이익에 상치되는 위험한 저항운동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4.8. 울름조형대학의 해체




1962년부터 숄자매재단 이사회에 의한 울름조형대학 해체과정이 시작되었다.  "환경디자인"이라는 새로운 연구분야의 형성과 함께, 토마스 말도나도와 구이 본지페를 중심으로 한 그룹의 사회참여의식은 울름조형대학을 공산주의적 저항집단으로 의심을 받게하였다.  따라서 울름조형대학은 우선 언론의 공작선전으로 매도되고, 마침내 정부당국과 의회로부터의 해체압력을 받게되었다.  1965년 울름조형대학에서 거행된 베트남전쟁 반대 집회가 마르크스주의의 조직단체로부터 후원된 것으로 비방되고 고발되자, 울름조형대학에 대한 정치적 기회주의적인 상황이 극에 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울름조형대학의 자치권을 처단하기 위한 경제적 압력이 강화되었다.  뒤이어 곧, 1968년 2월 23일 숄자매재단이사회의 해약고지가 통보되었다.  결국, 울름조형대학은 1968년 9월 30일 바덴뷰르템베르크 주의회의 결정에 따라 문을 닫았다.




나치시대에 판사로서 나치에 저항한 수많은 정치범의 사형판결에 참여했던, 당시의 주정부 총리 한스 필빙어(Hans Filbinger)는 1968년 12월 울름조형대학의 폐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하였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나가기를 원하기에, 이를 위해서 낡은 것의 해체가 필수불가결하게 요구된다".(14)




결국, 바우하우스의 이상을 계승하여 후기산업사회에서 새로운 인본주의 문화를 실현시켜 나가고자 15년간 끊임없이 노력하였던 울름조형대학은 바우하우스와 동일한 운명의 길을 걷게 되었다.






5. 울름조형대학의 의의




역사는 현재의 사회적 현실 속에 처한 문제들을 반영시키고, 그 해결안을 모색할 수 있게 하는 거울이다.  따라서 역사를 철저히 과학적으로 정립하는 것은 현재에 처한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는 작업이다.  울름조형대학 또한 - 지난 과거의 신화로서가 아니라 - 과학적 역사로서 명확하게 바로 세우고자 하는 것은, 울름조형대학의 역사가 오늘날 우리가 처한 잘못된 "디자인" 개념과 교육의 비전문성 등의 문제들을 풀어나가는데 가장 중요한 열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서 살펴본 울름조형대학의 발전사가 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의미는, 크게 다음과 같은 것으로서 이야기 될 수 있다.






5.1. 기능주의-모더니즘 비판의 모순




90년대 시대적 상황에 부합되어, 우리의 "디자인"은 판매를 위한 수단으로써 주목되어지고, 마케팅 요소로서 대중매체를 통하여 유행의 기류에 편승되어졌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가장 만연되어 있는 겉치례 욕구의 대표적 충족수단으로서, 너도나도 "디자인"을 내세우며 남발하고 있다.  겉치례를 위해 치장하고 내세우는 모든 것이 "디자인"이 되었다.  일상생활용품들에서는 이러한 유행의 흐름에 편승하여 "네오키치(Neokitsch)"가 대표적 "디자인"으로 선전되고, 해마다 모두 획일적으로 동일한 양식의 옷으로 갈아입은 "네오키치"가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80년대 미국의 디자인계에서 벌어졌던, 그 어떠한 개념도 없이 오로지 극단적인 개인이기주적 "스타"의 욕구만을 분출시켰던 것들을 모더니즘을 비판하고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숭배하고 추종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디자인계에서의 모더니즘 비판, 혹은 기능주의 비판은 60년대 후기산업사회로의 이행 이후의 선진국들에서 디자인과 연관된 후기산업사회의 총체적 사회문제들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였던 것이다(15).  여기에서 기능주의는 조형양식이 아니라 디자인 분야에서 사회적 인본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이념이었으며 모더니즘과는 구별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모던양식으로 이해됨으로써 모더니즘과 동일시 되었다.  그리고 바우하우스와 울름조형대학이 기능주의의 대표적 표본으로서 비판되어졌다.




바우하우스 당시의 역사적 현실과의 관계에 대한 규명 없이, 단지 조형양식적 측면만을 놓고 비판함으로써, 바우하우스가 추구한 기능주의의 본질이 간과된 "바우하우스 기능주의" 비판이었다.  이러한 방법은 역으로, 앞에서 언급한 바우하우스를 계승하였다고 믿는 막스 빌의 울름조형대학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막스 빌의 디자인관은 합리적 산업생산만을 추구하는 기계론적 고전기능주의의 독선적인 모습을 갖고 있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가-디자인이라고 하는 - 오늘날의 "사회적 디자인(sozio-design)"에서 인본주의적인 개인성 회복을 위하여 그 중요성이 부각되는 - 美 기능을 중심에 두는 양면성을 띠고있다.  이러한 막스 빌의 디자인관에 따라서 울름조형대학이 설립되었으나, 울름조형대학은 곧 젊은 강사들을 중심으로 하여 진정한 의미에서의 바우하우스 이념을 계승하는 조형대학으로 발전되었다.  따라서 막스 빌의 기능주의는 울름조형대학의 기능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막스 빌의 조형양식이 기능주의 또는 이와 동일시되고 있는 모더니즘의 비판 등에서 대표적 비판 대상으로 다루어지는 조형양식과는 상반되고, 오히려 기능주의 비판 혹은 모더니즘 비판 등에서 지향해야 한다고 내세우는 조형양식에 근접해 있다는 것이다.(16).




울름조형대학의 기능주의는 "환경디자인"으로 대표되어진다.  "환경디자인"은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와 마르쿠제(Herbert Marcuse)의 미학 이론과 프랑크푸르트학파(Frankfurter Schule)로부터 영향을 받아 사회적 인본주의 이념을 지향하는, 당시의 68운동과 그 맥을 같이하는 건축과 디자인 분야에서의 68운동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현대예술이 그 사회적 역할을 상실한 오늘날에는 이러한 울름조형대학의 "환경디자인"으로부터 역설적으로, 현대디자인을 사회적 인본주의 현대예술로 재정립하여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디자인의 사회적 영역, 즉 판매를 위한 사적 영역이 아닌 공적 영역의 개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5.2. 과학적 디자인과 디자인의 전문화




울름조형대학에서 추구한 디자인의 과학화는 바로 "환경디자인"의 실현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사회과학을 디자인에 도입시키고, 디자인의 사회성을 획득하고, 그 실천을 위하여 자연과학과 기술을 사용하였다.  이로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과학적 디자인이 이끌어졌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의 "디자인"에서 과학은 단지 수학통계 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디자인"이 마케팅기법의 하나로서 도입되고, 단지 판매를 위한 마케팅 전략으로서 통계조작기법만을 과학적 방법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디자인 연구" 들에서는 "시장경쟁력강화", "차별화", "소비자 중심" 등의 판매증진을 위한 표어 속에서 - 울름조형대학에서의 기술교조주의적 모습을 연상시키는 - 온갖 모든 표본조사기법과 통계조작기법 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최소한의 기본적인 수학과 통계이론적 바탕도 없이, 증명되지 않고 증명할 수 없는 수리식 만이 난무한다.  이러한 비전문적 모습들은 "도안"이 "장식미술", "응용미술", "상업미술" 그리고 "디자인" 또는 "산업디자인"으로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단지 옷만 갈아입었기 때문으로 밖에는 이해되지 않는다(17).  따라서 "디자인" 그리고 "산업디자인"의 개념과 정의는 단지 상황에 맞추어 갈아입는 옷으로 밖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발표되어지는 디자인에 대한 논의 대부분에서 산업디자인, 그래픽 디자인, 공학 디자인 등 모든 분야가 아무런 정의도 없이 "디자인"으로 돌변하여 혼용되고 있다(18).  그 과정에서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 상업적으로 과학이론의 치장을 하고 선전되는 유행적 신조어들이 무비판적으로 도입되고, 마치 과학적으로 정립된 이론인양 추앙받고 있는 실정이다.  디자인교육에 도입된 몇 안되는 과학과목 역시 전문가에 의한 교육은 전무한 상태이며, 단지 "도안가"에 의하여 내용은 상실된 채, 사대주의적 발상에 따라 공허한 외국어 단어주입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 결과, 디자인은 학제간 통합이 가장 중요한 전공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디자인"은 이와 같은 비전문성으로 인하여 그 어느 학문분야보다도 폐쇄적으로 고립되어있는 실정이다.




디자인의 전문화는 곧 과학화를 의미한다.  우선, 타 전공분야와의 학제간 교류를 위하여 디자인의 전문적 개념을 정의하여야 한다.  이는 바로 인문-사회과학의 도입을 의미한다.  인문-사회과학을 바탕으로 디자인의 개념을 정립함으로써, 디자인 내적으로는 그 전문적 발전을 위하여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디자인 관념과 방법론에 대한 담론의 장이 형성될 수 있으며, 디자인 외적으로는 사회적 발전을 위한 타 전공분야와의 학제간 교류를 이끌어 낼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의 사회적 실천을 위하여 디자인과정에 자연과학과 공학의 도입이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에서 과학의 도입은 "도안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울름조형대학의 과학화를 본보기로 삼아 바로 각 분야마다의 전문가에 의하여 보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