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승진 연세대학교






1. 의식주과 취향


이글은 앞의 정시화 교수가 전개한 우리나라 공업디자인 발전과정 서술을 비슷한 맥락에서 이후 10여년을 연장하여 서술한 것이다. 여기서는 90년대 들어 변화한 사회환경과 디자인의 성장발전을 말한다. 누구나 자신이 속한 역사시기를 가장 급변한 시대로 인식하기 마련이고, 그런 점에서 청장년기를 보낸 현세대에게 있어 1980년대 초반에서 최근에 이르는 20여년 사이의 변동이 명백해보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변동(social change)은 비교적 최근의 생각이며 역사 서술에 있어 정확한 개념도 아니다. 그럼에도 현대 사회의 시민은 매스컴을 통하여 국가와 세계의 경제변화를 인지하고 다양한 정보를 통하여 자신의 소득수준을 의식하고 임금경쟁을 벌이며 한편으로는 제한된 범위에서(자영업자-브루주아의 경우) 독립으로 경제적 선택을 하고 있다. 과거에 이런 경제적 자유는 소수에게만 국한되었다. 오늘날은 그렇지 않은데 이것이 현대 사회의 특수현상이다. 한편에 비교적 자유로운 소득 방식과 경제활동의 선택이 있다면 그 다른 끝에는 여유 있는 지출과 취향에 따른 소비가 있다. 그런데 이 수입과 지출 현상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 소비시장의 전제 조건으로 소비재 생산부문의 확립이 가시화 된 것은 1970년대 말이다. 1970년대가 끝나기 전 자동차와 백색가전과 같은 대형 제품 시장은 대기업 위주로 통합 개편되고 간혹 존재하던 중소기업들도 이들에 합병되었다. 반면 건설시장의 품을 타고 형성된 현대와 코오롱 등의 대기업이 전자기기, 통신기기, 가전제품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산업생산과 임금구조가 국제적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과정이 국가적 수입(생산시설과 외환보유고 등)을 올리는 동안 개인들은 부동산과 저축 등을 통해 경제기반을 확보하고 가처분 소득을 높였다. 80년대가 되면 상황이 급변하는데, 그 배경은 당시 저유가ㆍ저금리ㆍ저달러 등 `3저(低)'로 불리는 대외 여건의 호전이었고 소비자들의 지출 능력은 급속하게 확대되었다.




2. 산업과 경제


2.1. 번영의 시대와 1997년의 위기


80년대 후반이 되면 소비의 두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소비문화’가 형성되는데 이는 양적 만족에 기반한 의식주 충족적 소비에서 취향에 따른 소비가 주요 현상으로 떠오르는 것을 말한다. 취향에 따른 소비가 가시화한 것은 특히 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전후한 시기다. 86~89년까지 사상 초유의 4년 연속 흑자를 기록이 있다. 86년 1월에는 미국에 자동차를 수출하기 시작했고 89년에 반덤핑관세제도를 도입했다. 한편 과학과 산업부문에 있어 기술에 대한 독자적인 연구개발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실행과 시행착오에 의한 학습에서 벗어난 것이다. 경제규모가 확대되면서 기술도입의 주체도 정부에서 민간부문으로 바뀌고 특히 연구투자 자금과 능력이 뛰어난 대기업을 중심으로 전자기술과 반도체 생산 등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기술을 선점해 나갔다. 이 시기에는 특히 전자ㆍ전기, 자 동차, 조선, 기계류 등 중화학제품의 수출비중이 급격히 늘어났는데 89년에는 624억 달러로 10년 만에 약 4배 규모로 늘어났다. 같은 기간 연평균 수출증가율은 26.1%의 높은 신장률을 나타냄으로써 80년대 들어 최대의 호황기를 누린다. 이 때부터는 중국, 대만, 홍콩을 중심으로 한 중화경제권이 한국의 최대 수출시장으로 자리잡는다. 중화경제권은 이들 3개국가를 포함, 화교들이 경제를 주무르는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등 8개국을 말한다. 이 시기에는 수출시장의 변화는 거의 없었던 만큼 소비제품의 디자인의 경향역시 미국과 서구유럽 그리고 일본을 중심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선진국에 대한 집중수출로 인한 통상마찰 완화를 위해 시장다변화가 다소 진전됐으나 수출 대상국 1위부터 3위까지는 미국, 일본, 홍콩으로 변동이 없었다. 80년대 후반부처 90년대 중반까지 한국사회는 안팎으로 가시적인 성장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94년 10월의 성수대교 붕괴와 95년 삼풍백화점 붕괴 등 급속한 성장에 대한 대가를 치루었다. 이는 다시 97년말에 있은 국가부도사태와 IMF 구제금융의 위기를 불러왔으며 이의 극복과정에서 그간의 대규모 장치산업에서 정보기술 산업으로 비중이 커지는 등 산업구조의 재조정이 이루어졌다.  




90년대로 넘어오면서 한국은 수출부진기에 접어들게 된다. 근본적인 요인은 한국 제품의 경쟁력 약화에 있었다. 타개책으로 중남미 북방 아세안 등을 집중 공략했으나 미국 일본 EU등 기존 주력시장에서 밀려 전체 수출은 부진했다. 중남미 각국의 경제개발과 시장개방확대, 이스라엘과 PLO의 평화협정체결로 인한 정세의 안정, 그리고 국제 무역시장의 큰 손으로 등장한 중국의 활발한 구매력에 무역확대 전략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세계적인 컴퓨터 산업의 성장으로 반도체 수출규모가 79년 4억2600만 달러에서 89년 40억2300만 달러로 9배 이상 신장했다. 한편 86년 이후에는 수입수요 증대와 시장개방 확대로 의류 등 일반 소비재와 자동차 등 내구 소비재의 수입이 큰 폭으로 늘어났다. 미국과의 무역에서는 흑자 규모가 85년 43억 달러에서 87년 96억 달러로 계속 증가한 반면 대일 무역은 적자 규모가 85년 30억 달러에서 87년 52억 달러로 확대돼 지역간 무역수지의 불균형이 더욱 부각되기도 했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타결과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으로 개방화ㆍ세계화가 더욱 빨라지고 무한경쟁의 시대가 도래 했다. 수출 1000억 달러 시대를 열었다. 반도체가 94년에 단일품목으로는 최초로 수출 100억 달러를 기록하고 자동차 수출도 호조를 보였다. 전체 수출에서 중화학공업 비중은 90년 56%에서 98년 73%로 확대되었다. 97년의 국가부도사태와 이의 극복과정에서 99년에는 철강, 선박, 섬유 등 전통적인 수출주도 품목이 부진한 가운 데 반도체, 휴대전화, 초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 PC 등 4대 품목이 수출증가를 주도했다. 본 괘도에 오른 전자기술이 컴퓨터 사용을 일반화시켰으며 산업에서 금융,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전산ㆍ전자화 하였다. 이 현상은 각종 소비재 부문에 파급되기 시작하였고 네트워크와 극소 전자통신기술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이동통신에 대한 요구가 무르익었다.




2.2. 신경제와 네트워크 사회-2000년대


문민정부 이후 추진된 세계화는 거의 모든 부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외국산 제품에 대한 심리적 저항감이 거의 사라지면서 중산층 가정에도 외제 대형백색가전이 들어오기 시작하여 기존 국내업체들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정부의 방만한 외화정책은 1997년 국가부도사태를 불러왔다. 이후 짧은 시간동안 경제구조 조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소비시장의 거품은 진정되었으며, 산업구조가 크게 변동하여 정보통신산업이 급성장하고 컴퓨터 네트워크와 정보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벤처기업의 열풍이 불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 들어서도 여전히 지속되는 역동적인 모습의 중심에는 인터넷과 함께 이동통신이 자리하고 있다. 인터넷이 홈쇼핑 외에는 그렇다할 수익모델을 창출하지 못하는 가운데 이동통신 시장은 급속한 성장과 함께 두드러진 수익사업화하고 있다. 이 같은 변동특성은 한국 사회만의 특수한 현상이다. 이는 진작부터 이동통신이 도입되었지만 그 확산이 완만했던 서구사회와는 다른 모습이다. 한국의 이동통신 시장은 세계에 전례없는 성장을 이룩하였고 2003년 그 속도는 다소 누그러졌지만 아직도 진행의 모멘텀은 살아있다, 특히 조만간 개인소득 2만 달러의 단계에 돌입하면 그 양상은 더욱 특수해질 것이다.




3. 디자인의 대중화와 세계화


3.1. 대중화


90년대 초는 실질적 측면에서 우리산업의 자체 핵심기술이 열매를 맺고 나름대로의 디자인 능력을 드러낸 때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1991년 현대자동차가 독자적 기술로 개발한 1500cc 알파엔진과 같은 해 7월 출시된 기아자동차의 스포티지가 그것이다. 스포티지는 기존 1톤 트럭이나 승용차의 엔진을 그대로 적용하고 기계적 신뢰성에도 다소 문제가 있었지만 우리 고유의 디자인이었고 이후 세계적으로 형성된 소형다목적 승용차(SUV:subutility vehicle)의 최초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80년대 후반 급성장한 수출은 특히 가전제품과 자동차 같은 완제품 수출에 있어 세계 시장에 대한 분명한 의식과 이에 대비한 디자인 개발의 필요성을 절감케했다. 당시 금성사는 그간 자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해온 디자인 공모전을 국제공모전으로 확대하여 91년에 열린 제1회 국제디자인공모전에는 19개국에서 253점의 출품되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후 2년마다 열린 이 공모전은 한국 기업이 호스팅하는 대표적인 국제 공모전이 되었다. 사실 기업입장에서 공모전 결과의 활용은 부차적인 것이었고 본질은 제품디자인 지망생들에 대한 후원과 장래 디자인 스타의 발굴과 더 크게는 공모전의 진행과 홍보를 통하여 세계 여러 나라에 한국과 금성사의 상표이미지를 알리는데 목적이 있었다. 93년 8월에는 국제조명이 주최한 제1회 국제조명공모전이 열렸고, 95년에는 현대자동차도 한국자동차디자인 공모전을 시작했다.




94년은 우리나라의 양대 공중파 방송인 KBS와 MBC TV가 각각 국직한 디자인 기획특집을 내놓는다. 1월에 MBC는 ‘왜, 디자인인가’를 통하여 제품 개발에 있어 디자인의 중요성을 알렸으며, 그해 4월 한국과학기술원의 정경원 교수가 나래이터를 맡은 KBS TV는 ‘디자인에 승부를 걸어라’라는 타이틀로 경제적 수단으로서 디자인뿐만 아니라 문화의 한 모습으로 디자인의 모습을 강조함으로써 디자인에 대한 대중화는 폭넓게 확산되었다. 95년을 전후로한 시기는 디자인에 관련된 논의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진 때이기도 하고 이는 곧 대상으로 디자인(제품) 뿐만 아니라 사회적 이슈나 문화적 주제로서 디자인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졌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디자인에 있어 모방과 표절의 문제도 심심치 않게 대두되었는데 중소기업은 물론 대기업의 제품이나 상표가 외국의 것과 유사하다든지 특정 디자인 공모전의 수상작이 외국의 제품과 닮았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감상에 이은 비평부문이 분야를 격려하기 보다는 비판하는 방향에서 먼저 시작되었다는 것은 다소 불행한 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디자인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디자인박물관이 94년 1월 서울 서초구 방배동 한샘사옥 2층에 170평 규모로 문을 열었다. 초대 관장으로 국민대학교 조형대학의 정시화 교수가 선임되었고 60점의 컬렉션과 정기간행물과 단행본 등을 소장한 자료실을 갖추었다. 이후 디자인을 주제로 한 기획전시회가 잇달았고 디자인에 대한 감상 역시 문화활동의 한 영역으로 자리잡는 모습을 보였다. 지금은 예술의 전당(Seoul Art Center)내 디자인 미술관이 국내외 기획 전시와 신인 디자이너의 활동 소개에 더욱 주력하고 있다. 디자인 대중화의 양상은 이시기 활발히 전개된 지방자치단체의 상징과 마크 제작이다. 귀엽다는 이미지 하나로 혹은 지나친 기하학적 패턴으로 다소 획일적 이미지를 양산했다고는 하나 각 지역의 시각적 특성(identity)을 도입한 것은 가장 가시적인 디자인 성과였으며 지자체가 지역의 이미지를 높이는데 기여했던 것은 사실이다. 지자체는 후속작업으로 버스정류장과 상징물제작 등 거리환경의 개선에 디자인을 적극도입하기 시작했는데 96년 이후 디자인계에 불황의 그림자가 드리울 무렵 많은 디자이너에게 일감을 제공했다. 불황을 앞둔 기업의 대응 방식은 대기업의 경우 차세대 첨단 제품의 소개, 양문닫이 냉장고의 도입 등 가전제품의 대용량화 , 국산 스포츠카와 같은 프레미엄 제품의 출시 등이었고, 내부적으로는 차세대 정보기기개발에 비중을 둔 이동통신기기의 기획과 사용성연구 등을 시작하고 있었다. 중소기업의 경우 좀더 모험적 성격이 강한 컴퓨터와 인터넷 관련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개발이었다. 한 예가 이미지드롬에서 개발한 포토샾 플러그인의 개발이다.




3.2. 지방화와 뉴컨텐츠


1990년 우리나라의 총광고비는 2조원에 이르고 특히 캐릭터(character) 산업은 연간 1000억원의 시장을 형성하고 매년 15-20%가 성장한다. 당시 가장 인기있는 국산 캐릭터는 금다래와 산머루, 떠벅이 그리고 아기공룡둘리 등이었다. 특히 아기공룡둘리 같은 유아적이며 귀여운 캐릭터는 이후 가장 전형적인 캐릭터의 이미지가 되는데 이는 대중적이고 적용하기 쉬운 측면도 있었지만 한편 개성이 없고 획일화한 모습으로 비판받기도 했는데 특히 수많은 지자체(시, 군)가 도입한 캐릭터들이 그러했다. 이 분야는 이후 약 10년간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했는데 초기에는 지자체의 수요가 있었고 두 번째는 인터넷 확산에 따른 웹디자인과 개인과 단체의 홈페이지 소품으로, 그리고 아바타와 모바일 기기의 이미지 컨텐츠로 지속적인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디지털이미지는 인터넷을 통하여 무제한의 복제와 확산이 가능했고 중독성과 가속성이 강했다. 사회전반에 확산되기 시작한 또 다른 디자인 현상의 또 다른 모습이 정치 광고다. 이전의 무미건조한 선거용 포스터와 경직된 인물 사진 대신 다양한 색상의 인쇄물과 사진 연출이 도입되었고, 각 정당의 글자체와 마크가 새롭게 디자인 되었다. 직업영역에서 시각디자인을 중심으로 프리렌서 디자이너가 분명한 직업 유형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른바 컴퓨터를 사용한 탁상출판(desk top publishing: DTP)은 고해상도 출력을 제외한 디자인의 전 과정을 한명의 디자이너가 할 수 있게 했는데, 조판공에 이어 사진식자 업체가 사라지는 현상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한편 시각디자인산업의 원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컴퓨터용 전용 서체를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한소프트의  ‘글‘과 윤디자인연구소에서 개발된 윤서체가 대표적이다. 이는 적어도 우리가 고유의 글자와 언어를 갖고 있는 한 디자인에서도 독자적 영역을 확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원천적 창조성과 기술은 시대를 막론하고 중요한 것이다. 92년에 출범한 새 정부는 산업디자인진흥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는 다음해 있은 공업기반기술개발 지원자금의 확대로 이어졌고 이후 줄곧 확대된 진흥정책의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3.3. 세계화와 교육에서 변화


디자인을 주제로 해외 전시회 참관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한 디자인 박람회 개최도 활성화했다. 예를 들어 주식회사 거손은 디자인 박람회의 개최와 진행 기술을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후 있은 대전 엑스포(93년)는 여러 디스플레이, 시각디자인, 실내디자인, 환경디자인 분야가 도전할만한 소재였다. 동구권의 민주화와 소련의 해체 그리고 김영삼 정부 초기의 대북 해빙 무드에 어울려 95년 전후로 북한 디자인과 사회주의권의 디자인이 소개되기도 했다. 조형적 수준이나 기술적 내용이 상대적으로 뒤떨어진 이유로 이런 경향은 약간의 복고주의적 취향을 자극하였을 뿐 선진국과 다국적기업이 주도한 세계적 상표와 이미지에 곧바로 압도되었다. 디자인에서 세계화란 주로 외국 디자인과 디자이너에 대한 관심과 첨단 디자인의 수입에 의존했는데 다소 무작위적이고 무분별한 양상이었다. 교육부문에서도 해외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각종 단체가 디자인 해외연수 등을 기획하고 디자인 분야 유학정보, 세계의 이색 디자인학과 소개 등의 기사가 빈번했다. 대학 재학 중 1년 정도는 해외로 어학연수를 다녀오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들뜬 분위기는 97년 금융위기 맞고 진정되었다.




교육에 있어 세계화와 개방화가 가져온 하나의 성과라면 디자인과가 반드시 미술대에 속할 필요는 없다는 인식의 확산이다. 93년에 개교한 계원예술조형학교는 조형이란 주제로 산업디자인, 제품디자인, 가구디자인, 실내디자인, 공간디자인, 조형예술, 건축 등의 교과만을 전문화한 학교로 출발하여 예상외의 성과를 올렸다. 교육특성화의 일환으로 디자인 전문대학원 개설도 있었다. 94년 4월에 국민대가 디자인대학원을 열어 신입생을 모집했다. 예능대나 미술대가 아닌 공과대에 속하여 엔지니어링 측면이 강조된 교육도 가능하며,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교과과정의 개설, 경영전략 측면에서 디자인 역할의 강조 등, 디자인에 있어 다양한 학제를 도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는데 92년에 문을 연 한국기술교육대학교의 디자인공학과 등이 한 예이다. 디자인분야의 양적 성장은 교육부문에서도 나타나 대학설립이 사실상 자유화하며 우후죽순 생겨난 지방의 여러 대학에 디자인관련과가 생겨났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까지는 제품(산업)디자인과가 90년대 후반 들어서는 멀티미디어 등 컴퓨터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학과가 많이 개설되었다. 95년 월간디자인에서 실시한 설문에서 82%의 학생들이 ‘디자인은 장래성있는 직업이다’란 점에 찬성했지만 디자인 지망생의 수에 비하여 디자인의 수요는 크지 않았다. 특히 93년 기준으로 매년 1만 9천명의 예비 디자이너가 배출되는 양상은 고용부문에 있어 큰 사회적 부담이었다. 디자인교육의 급작스런 성장은 장기적 수요 예측이 없는 상태에서 추진 것으로 교육의 질과는 무관하게 과다한 인력을 배출했고 이는 90년대 후반 불어 닥친 경기침체와 맞물려 디자인계에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3.4. 정책 변화의 필요성 대두


일찍부터 분야의 양적 팽창과 정부의 방향성 없는 진흥정책에 위기를 느낀 산업디자인계의 우려를 반영하여 한국산업디자이너협회는 93년 11월 한국디자인진흥정책 공청회를 연다. 여기서 제안된 사항은 1. 국내와 환경을 철저히 진단한 후 정책을 추진할 것, 2. 단기적 사업에만 집착하지 말고 장단기적 정책 비젼의 제시, 3. 정책시행에 있어 공정성있는 추진체계를 설정할 것, 4. 국가사업을 위탁받은 단체가 디자인용역사업에 직접 참여하는 모순 등을 시정할 것 등이었다. 이런 가운데 90년대 중반이 되면 디자인 분야의 양적성장은 정부지원에서도 두드러지는데, 94년 당시 상공부는 매해 5월 2일을 디자인의 날로 정하고 당해 디자인 분야에 대해 60억원의 정부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정책은 그 시행을 위탁받은 당시 한국산업디자인포장개발원을 통하여 계속 이루어졌고 디자인계의 의사와는 동떨어지게 여전히 주무부서인 상공부와 개발원 모두가 지원사업의 외형과 규모에 주로 집착했기 때문에 분야의 내적 기반을 강화하는 질적 발전의 측면은 대부분 등한시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94년 9월부터 시작된 전국국민(초등)학생산업디자인공모전의 개최다. 초등학교 교육의 기본 목적은 인성교육에 있는 만큼 이들의 창작활동이 실용적 목적을 가질 필요는 없다. 상공부(산업자원부)나 개발원(재단법인 한국디자인진흥원)이나 디자인을 하나의 산업부문으로 인식하고 산업적, 혹은 직업적 차원에서 정책이나 진흥활동을 벌여야하는 것이 정상임에도 정책의 목적과 수준을 구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은 해당 주무부서가 있고 대민 홍보활동도 그렇다. 아직도 진행되는 초등학교, 중고교 디자인전은 산업에 응용하기엔 지나치게 아마추어적이고 하드웨어전시 중심의 산업디자인전은 그 결과를 산업일반에 적용할 수준이 못된다. 21세기에 맞는 디자인 정책과 진흥을 위하여 기존의 관습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4. 디자인 전문화와 통합화


90년대 들어 활발해진 전문화의 모습은 주로 기업 菅??대학 연구소에서 나타난다. 즉, 대학 내 디자인연구소의 설립, 가전제품회사를 중심으로 한 산학협동의 활성화, 디자인전문회사의 성장과 활성화, 그리고 디자인 전문 박물관의 설립 등이다. 그간 대학교수들의 개인적 수주활동으로 진행되던 디자인 프로젝트(용역)가 대학부설 디자인연구소들을 경유하여 진행된 것도 또 다른 양상이다. 특히 제품디자인 관련 개발과 전략연구를 중심으로 연구소 중심의 활동이 두드러졌는데 이는 분야가 하나의 제도화한 연구체계에 적용할 수 있는 대상임을 보여준 것이다. 산학협동의 전형적인 모습은 대우전자가 1990년부터 시작한 ID camp이다. 내용은 기업이 제시한 디자인주제로 학생지원자들이 사전 연구를 하고 이를 바탕으로 회사 소속의 전문디자이너들과 일주일간 합숙하며 구체적인 디자인발전을 진행하는 는 것으로 진행한 작업결과는 대한 평가와 자문은 기업의 디자인부서장과 지도교수 그리고 외부 위촉 전문가를 초치하여 진행했다. 91년 2회 ID camp 에는 26개교에서 31팀, 62명이 참가했고, 이는 이후 삼성디자인멤버쉽(93년), 금성사 디자인 인턴쉽(94년)으로 이어지면서 산학협동의 본격적인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1991년 6월 21일에는 한국디자인전문회사협회가 창립되어 초대 회장에 은병수 212Korea 사장이 피선되었다. 그 기능은 디자인정책연구와 자문이었고 특히 산업디자인진흥법에 관련된 대정부 건의를 단기 사업목표로 했다. 세부적으로는 디자인 용역기준의 산정과 고시, 디자인 정보망 구축, 전문회사가 공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CAD센터의 설립 등이 있었다. 93년을 기준으로 10여개였던 제품디자인전문회사는 97년 중반 132개까지 늘어난다. 같은 해 8월에는 산업디자인분야의 3개 단체인 한국인더스트리얼디자이너협회(KSID), 한국디자인전문회사협회(KIDCA), 그리고 한국디자인협의회 산하 산업디자인협회(INDA)가 통합하였다. 당시 특히 컴퓨터의 지원 디자인(CAD)의 확산은 같은 해 한국그래픽디자이너협회(KOGDA)에 컴퓨터그래픽 분과가 만들어지는 것에서 분명한 경향을 읽을 수 있다. 이후 컴퓨터를 중심으로 디자인 전문화의 새로운 영역이 빠르게 만들어지고 세부적으로 전문화하기 시작하였다. 전문화의 한 측면이 기술적 특성화라면 또 다른 면은 전문성에 대한 윤리적 지표의 설정이다. 대표적 사건이 당시 부수언 서울대 교수가 회장을 맡고있던 한국산업디자이너협회에서 시행한 96년 2월에 산업디자이너윤리강령의  선포다. 그 주요 내용은 산업디자이너는 먼저 디자인의 공익성과 환경친화성에 준한 활동을 해야하며, 둘째 문화육성의 의무와 분야의 전문성 제고에 노력하고, 세 번째, 직업 활동에 있어 책임성을 갖고 명예와 품위를 유지해야하고, 대사회적으로 디자인의 공공성을 인지하고 공공목적을 위한 정책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전문연구와 학술적 측면을 강조하는 일면은 94년 2월에 한국산업디자이너협회가 디자인연구 1호를 발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 해 5월에는 한국인더스트리얼디자인너협회(한국산업디자이너협회의 전신)의 초대회장을 맡았던 서울대 민철홍 교수의 정년퇴임을 기념하는 책자 ‘디자인의 새로운 지평’이 발간되었는데 퇴임과 기념 책자와 전시회 개최는 한국 산업디자인의 제1세대를 자리매김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96년을 전후로 활발해진 해외 디자이너들의 방한 강연과 전시회에 이어 97년부터 8월 터론토에서 있은 세계산업디자인단체협의회(ICSID)대회에서 2001년 제22차 대회 유치국으로 한국이 선정되었다. 이는 디자인계에는 고무적인 소식이었으나 96년 이후 줄곧 우리경제 전체에 가시화하기 딜레마는 시작한 중국과 동남아 제국의 추격은 가가와 지고 선진국과 격차는 여전했다. 중저가 시장에서는 가격경쟁력을 급속히 상실하면서 선진국 수준의 고부가가치 제품을 디자인의 단계에는 들어서지 못한 때문이다. 월간 디자인네트가 실은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에게 디자인정책 인터뷰는 결과적으로 당시 차기 정부가 갖고 있던 상황에 대한 시각과 대비를 보여준다. 먼저, 복제방지를 위한 저작권법의 적극도입, 두 번째, 색채학, 심리학, 인체공학과의 연계 필요성, 세 번째, 민간부문의 창의성 우산을 바탕으로 한 산업디자인진흥원을 통한 지원기능 강화, 세 번째 연구개발-권리취득-사업화-금융, 세제, 유통 지원의 종합적 육성체계 수립과 고유 브랜드 개발 등이 포함되어있었다. 특히 김총재는 문화정책으로 디자인 진흥과 대중화를 강조했는데 당선이후 문화관광부를 통한 문화프로그램개발, 대중참여, 미술품설치의무조항의 지속 등 소프트웨어 중심의 디자인 개발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집권 이후 김대중 정부가 보여준 문화정책 드라이브와 소프트웨어 중심의 벤처육성에서 일정부분 반영되었으며 그해 말 닥친 IMF 구제금융 사건과 국가부도에 따른 산업구조 조정을 통하여 촉진되었던 점은 아이러니다.




한국산업디자이너협회에서 97년 부수언 회장 재임 시 제정한 한국산업디자인상(Korea Industrial Design Awards; KIDA)은 국내 산업디자인의 선진화와 디자이너의 세계화를 목표로 시행된 것이다. 이 상은 매년 산업디자인 신제품을 대상으로 우수 디자인 제품을 선정하여 '한국산업디자인상' 인증제도를 실시함으로써 디자이너의 창작 행위에 대해 전문성을 존중하는 동시에 책임을 요구하고 아울러 선정된 우수 제품들을 전시, 작품집 출판, 기사화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홍보함으로써 우수하고 고유한 디자인 개발을 위한 창의적 활동을 장려하고 산업디자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새롭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출품자격은 대한민국 국적의 디자이너(또는 한국 디자이너가 포함된 집단)에 의해 디자인되었거나, 한국 기업에 의해 생산된 제품이며 최근 1년 이내에 생산되었거나 연내에 출시가 확정된 제품으로 한정하였다. 이 상은 분야의 비영리 전문단체가 시행하는 공익을 위한 디자인 진흥활동이란 점에서 신선한 충격이었다. 또한 1. 일상 생활용품(Consumer Products), 2. 산업용품 및 사무용품 (Industrial & Business Products), 3. 가구 및 환경 관련 제품 (Furniture & Environmental Products), 4. 운송 기기 (Transportations) 승용차, 상용차, 기타 운송수단, 5. 기타 (Others) 디지털 미디어 제품, 6. 양산을 전제로 한 프랙티컬 디자인, 실험성이 강조되는 컨셉츄얼 디자인, 조형적 실험, 학생 작품 디자인 탐구(Design Exploration)로 산업디자인 전문영역에 국한함으로써 전문성과 권위를 유지하고 있다.




경제구조조정과 산업부문의 적극적인 태도가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난 것은 전경련이 조직한 98년 7월의 제1차 산업디자인협의회의 개최이다. 당시 초대회장을 맡은 박종서 현대자동차 상무는 협의회 구성이 폐쇄적으로 활동해 오던 각기업의 관계를 개방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비슷한 시기 각 지방 대학을 중심으로 디자인혁신센터(DIC)사업이 실시되었다. 내용의 골간은 디자인 인프라가 약한 지방의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해당 지방의 디자인혁신센터는 이들이 개발코자하는 제품에 대한 디자인 자문과 지도, 실험 및 모형제작을 지원해주는 체계다. 기본 취지는 바람직하지만 시행에 있어 하드웨어와 설비 위주로 투자됨으로써 설치 후 운영과 전문인력 수급에 많은 애로점을 드러내고 있다. 혹독한 조정기를 거쳐 99년에 들어서면 어느 정도 경제가 되살아난다. 같은 해 ICSID의 주요행사 중에 하나인 InterDesign Workshop이 7월초부터 2주간 이화여대에서 진행되었다. 이는 사전 행사의 일환이었고 같은해 그래픽디자인 분야의 X-design '99 Seoul과 2000년 세계그래픽디자인 특별총회(icograda)가 있었다. 그리고 2001년 ICSID 서울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우리나라 디자인계가 실질적인 세계화를 이루었음을 보여준다. 같은 해 성남시 분당구에 개관한 코리아 디자인센터에는 한국산업디자인진흥원과 여러 디자인 관련단체가 입주하여 전문 활동을 벌이고 있다. 




5. 참고자료


월간디자인 1990년-1996년 발행분


월간디자인네트 1997년-2001년 발행분


http://www.designdb.com/


http://www.kaid.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