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디자이너 헨리 드레이퍼스


‘인간을 위한 디자인’
헨리 드레이퍼스(Henry Dreyfuss, 1904-1972)는 미국에서 활동한 20세기의 대표적인 산업디자이너이다. 어려서부터 완벽주의를 추구하던 그는 진보적 교육자로 통하던 애들러(Felix Adler)가 있는 윤리학교에서 인간의 타고난 본성과 개성, 그리고 문화적 필요성에 기초한 자유교육의 철학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장래 그의 경력에서 표현되듯이 사물보다는 인간을 중시해야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지혜롭고 학문적인 태도는 그가 디자인한 여러 제품과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하여 그대로 드러나는데, 고객과 소비자 모두를 세심하게 배려하는 산업디자이너로서 모범적인 모습이 그것이다.



그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을 위한 디자인(Designing for People)>에서도 1920년대 후반부터 다루고 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가족 배경에 대한 내용은 죽기 직전 그의 아들에게 짤막한 메모로 남겼을 뿐이다. 그의 조부모는 모리츠 드레이퍼스(Moritz Dreyfuss)와 조피 오펜하이머(Sophie Oppenheimer)로 1873년 1월 26일 독일 만하임에서 결혼한 직후 뉴욕으로 이주했다. 네 자녀를 두었으나 위의 둘을 전염병으로 잃고 루이스(Louis, 1878-1915)와 조시(Josie)만 남는다. 모리츠와 루이스는 뉴욕 23번가에 극장용 장식물과 의상을 취급하는 가게를 내고 루이스가 재단사로 일한다. 1903년 루이스는 엘지 고지(Elsie Gorge, 1880-1937)와 결혼하여 1904년 3월 2일 헨리를 낳고 잠시 브루클린에 나가살았는데 그때 동생 아놀드가 태어난다(1909년 2월 20일). 둘째를 보고 바로 맨해튼의 할아버지와 합쳤는데 헨리는 1910년에서 1914년 10월까지 거기서 공립학교를 다닌다. 거기서 헨리의 조부모가 돌아가시고 그의 아버지 루이스는 폐병에 걸려 요양차 사라낙 호수로 이사한다. 헨리 드레이퍼스는 이 시절을 ‘참으로 추웠다’고 회상한다. 다시 그의 이모가 뉴저지의 모리스타운에 세낸 집으로 돌아왔으나 도착한 다음날 루이스가 숨을 거둔다. 가족은 1915년 2월에 맨해튼으로 돌아와 1918년까지 거기서 학교를 다니면서 재단사와 칠장이로 일하며 세 명의 가족은 어려운 시절을 보낸다.


완벽주의
윤리학교를 다니기 전 드레이퍼스는 1919년에서 1920년까지 타운센트 해리스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곳의 어떤 선생이 그의 미술교과에 만점을 주었다. 그러나 알바니의 교육위원회는 만점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고 그의 점수를 98점으로 조정한다. 이에 환멸을 느낀 헨리는 자퇴를 하고 더 이상 제도교육과는 인연을 끊고자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담임선생은 뉴욕윤리문화협회에 연결하여 소속 미술학교에서 그에게 2년간의 장학금을 받게 주선했고 여기서 그는 1920년 9월에서 1922년 6월까지 재학하여 예외적으로 단 2년만에 졸업한다. 이 학교는 다방면의 예술영역과 공예기술, 산업미술, 인문자연사회과학 과목이 잘 조직된 교과로 구성되어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드레이퍼스는 스스로 지적소양을 갖추게 되었을 것이다. 재학 시절 그에게 영향을 준 두 선생은 엘리엇(John lovejoy Elliott)과 뮤덴(Emma Mueden)으로 엘리엇 선생은 사람들의 독특한 요구사항을 파악하고 바람직한 관계를 유지하며 일을 꾸려나갈 수 있는 윤리적 기초를 가르쳤고, 영어 선생인 뮤덴은 무대연출을 위한 실무적인 내용을 지도했다. 나중에 그녀는 드레이퍼스의 장차 부인을 소개 연결한다.



성품이 온화하고 사람을 사귀는데 사업과 연관성을 따지지 않았다. 뉴욕 거리를 활보하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것을 즐겼다. 다만 그의 아내 도리스는 쇼핑을 싫어하여, 결국 그는 흥청되는 뉴욕을 떠나 켈리포니아 파사데나로 이주했다. 그러나 그의 사무실은 그대로 뉴욕에 두었으며 회사의 고객 역시 대부분 미동부 연안에 있었다. 복장은 갈색의 정장만을 입었으며 호텔에서 묵는 법이 없이 별도의 정해진 숙소를 이용했고 식사도 단지 두 곳만을 항상 이용했다. 비록 대학을 졸업하지는 않았으나 관여하는 모든 분야의 지식에 정통하였고, 대기업과 일했지만 50년대 공산주의 마녀사냥을 진두지휘한 메카시(McCarthy)의 블랙리스트 오른 작가들을 도왔다. 사업의 재정부문은 부인이 전담하였고 그는 평생 이에 관여치 않았다. 1968년 말 일선에서 물러났고 1972년 부인이 암으로 가망 없이 고통 받을 때 그는 사랑하는 이와 죽음의 길을 같이했다.


협동정신: 모델 500(1949년)의 개발
헨리 드레이퍼스가 벨전화연구소(BTL: Bell Telephone Laboratory)와 일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부터이고 처음 개발에 관여한 모델은 1932년에 나온 302였다. 처음 벨전화연구소는 1000달러를 줄테니 그럴듯한 외관의 송수화기 통합식의 신형 모델을 개발해달라고 주문했으나 그는 독자적 디자인을 거부하고 연구소의 엔지니어와 공동작업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나중에 그의 방식이 효과적이었음이 밝혀진다. 특히 엔지니어와 협력을 강조하였는데 엔지니어야말로 디자이너에 대한 가장 치열한 비판가로, 바로 이점 때문에 누구보다도 훌륭한 디자이너의 친구라고 주장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판매실적 저조가 엉성한 형태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 기업 책임자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디자이너를 고용했을 때 형태에 대한 지식이 없는 엔지니어가 이들에 대하여 적대감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몇 개월의 조심스러운 대화를 통하여 디자이너의 역할이 이들의 일을 잠식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시킬 수 있었다. 그 기업과 우리의 계약기간이 만료되었을 때 기간 연장을 요청한 것은 오히려 이들 엔지니어였다.’고 한다.



모델 500(1949년)의 개발에서 벨연구소가 가장 강조한 것은 아름다운 형태와 잡고 들기 편안한 송수화기였다. 또하나는 수화기를 놨을 때 스위치를 정확히 눌러 확실히 전화가 끊기도록 하는 것으로 통화 후 잘못 놓인 전화기로 인한 장애가 벨사의 큰 골치 덩어리 중에 하나였다. 이에 따라 수화기를 잘못 놓는 확률을 최소화할 수 있는 디자인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반면 유지보수의 문제는 고장이나면 통채로 교체해주는 방식이라 이전에 비해 중요성이 줄었다. 이런 배경 하에, 드레이퍼스의 디자인 팀은 8년간 2500장의 도면을 그려보고 2000명의 사람 얼굴을 측정하고 다시 수많은 점토 모형과 도장한 석고 주형과 모형을 만들어 보는 실험 끝에 신형 ‘유니버셜500(Universal 500)’모델을 개발하였다. 평범하지만 안전하고 편안하며 효율적이고 판매 수익이 좋은 모델로 35년 간 1983년까지 생산되었다. 벨연구소는 드레이퍼스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그가 디자인 할 때 엔지니어 이상으로 내부 부품의 효율적 배열에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그 역시 전화기의 디자인은 안에서 시작하여 밖에서 마무리된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전화기에 적용된 둥근 사각 단면(lumpy rectangle)의 손잡이를 가진 G1 수화기는 1948년 특허번호 151,614로 등록되었고 오늘날까지도 가장 쥐고 다루기 편안한 디자인으로 알려져 있다.


디자인 개발 과정(design development process)의 정립    
이 모델의 개발을 통하여 그는 디자인 개발의 기본 전개방식을 설정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크게 여섯 단계를 거치는데 분석(analysis), 스케칭(sketching), 모형제작(modeling), 도면작성(drawing), 제시(showing), 그리고 평가(critique)의 순서를 갖는다. 각 단계를 좀 더 자세히 보면:


1) 분석단계: 디자인 팀은 문제 규명(defining problem)을 먼저 시작하고 기존의 제품들이 어떻게 제조되었고 모양은 어떠하며 사람들이 어떻게 쓰는지를 살펴본다. 그리고 새로운 디자인을 통하여 해결할 수 있는 점은 무엇이 있는지 파악한다. 이어 발상과 자유토론(imagination and brainstorming)을 통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데, 예를 들어 모양을 바꾸면 어떨지, 모서리를 둥글게 하면 어떨지, 색상을 더하면 어떨지 등등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2)스케칭 단계는 새로운 발상을 빨리 그려보고, 간단한 설명을 붙이고, 수정하고, 발전시키고, 평가하는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3) 모형제작은 앞의 여러 스케칭한 그림에서 선택된 것들을 3차원으로 만들어 보는 것인데 전화기의 경우 몸체와 손잡이, 다이얼을 별도로 제작하여 조립하여 모델을 완성하였다.


4) 도면작성은 제작된 모형을 세부 측정하여 언제든지 도면만 보고도 다시 만들 수 있도록 설계도를 제작하는 일이다.


5) 제시단계는 이렇게 만들어진 도면과 모형을 관련 전문가(벨연구소 직원 등)들에게 보여주고 디자인의 기본 개념을 설명하는 것이다. 모델500의 경우 송수화기는 나무로 여러 개의 모형을 깍아 제시했는데 신체에 직접 닿고 조작되는 부분인 만큼 실질적인인 착용감과 사용성을 비교해보기 위함이었다.


마지막 6) 평가단계에서는 제시된 여러 모형 중 선정된 모델 내부에 기계를 달고 작동되게 하여 직접 소비자가 써보게 하면서 신체에 잘 맞는지 조작이 편한지 전반적 성능은 어떠한지를 파악한다.


산업디자이너의 원칙
미국에서 1930년과 1950년대는 산업디자이너들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때였다. 1959년 미국의 기업들은 통틀어 50억 달러를 제품의 시각 이미지 개선에 썼다. 145명의 직원을 둔 로위의 회사는 당시 3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그 역시 이 시절 특유의 책임감과 성실성, 그리고 디자인 능력으로 최고의 연봉을 올리면서 물적으로 정신적으로 성공했다. 그는 물론 소비자와 생산자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가게 했다. 플로스는 그의 회사가 미국에서 산업디자이너의 전문 직업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같은 시기의 인물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레이몬드 로위(Raymond Loewy), 게데스(Norman Bel Geddes), 그리고 티그(Walter D. Teague)에 비해 그는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좀 더 존경받는 사람이다. 그는 인기에 영합하여 무책임하게 일을 확장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확인하고 진행할 정도의 수준에서 일감을 제한하였다.



당시 유명세를 타던 여러 디자이너들은 개발 제품의 외관을 현란하게 꾸미는데 치중하였지만 그는 의식적으로 이를 경계하였는데 공공연히 “정직한 디자인은 안에서 밖으로 향하여 만들어지는 것이지 겉모양이 내부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점등으로 인하여 디자이너의 양심과 자세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단연 그가 꼽히며 이것이 많은 디자인회사들이 그의 사업원칙을 그대로 따르는 이유이다. 1946년부터 그의 회사에서 일한 사람으로 퍼셀(William F. H. Purcell)이 있고, 1950년대 중반에 닐 디프리엔트(Niel Diffrient), 코너(James Conner), 그리고 제나로(Donald M. Genaro)가 같이 일했다. 그는 회사 규모를 작은 수준에서 일정하게 운영하여 뉴욕 사무실도 전체가 30명을 넘은 적이 없으며 캘리포니아에는 항상 10명 미만으로 유지하였다. 


 
그가 뉴욕에 작은 산업디자인전문회사를 차린 것은 1929년으로 거기서 그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무대디자인과 산업디자인 일을 동시에 진행했다. 그는 디자인 과정에서 제품을 직접 다룰 엔지니어와 관련 생산 전문가와 의사소통을 상당히 중시하였는데 도면과 모형제시를 통하여 새로운 디자인의 장점을 충분히 설명하고, 반대 입장에서 만일 제품이 새로운 디자인으로 변경될 경우 발생 비용의 문제도 반드시 확인하였다.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엔지니어와 디자이너 등 참여 전문가들 사이의 의견 충돌을 낳는데, 의견이 실질적이면 받아들이지만 좋은 의견이라도 애초의 디자인 의도를 건드릴 경우에는 수용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무엇보다도 각 참여 전문가들 의견의 공통적 부분을 찾으려 노력하였다. 디자이너는 여러 전문가의 의견을 종합하여 제품의 성능과 질을 높일 수 있는 방향을 찾는데 주력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디자이너는 제품과 고객에게 자신의 디자인을 강요하지 말고 협조적 과정을 통하여 공동의 목표를 찾아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채승진(연세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