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량 생산 수단과 문명의 발달 >

Ⅰ.서론

오스트레일리아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은 아직도 석기를 사용한다. 그들이 열등해서 그런 것일까? 거대했던 아즈텍 제국은 스페인의 총기 앞에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멕시코인들이 열등했던 것인가?
누구나 한번쯤은 왜 인류의 역사는 불균형적으로 발전되어 왔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져 보았을 것이다. 몇 세기 전만 하더라도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차이를 가지고 있으며, 우월한 민족과 열등한 민족의 역사는 결국 지금의 사회를 만들어 왔다는 것에 아무도 의심의 물음표를 달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생물학적인 차이는 거의 인정되지 않는 추세다. 인간의 능력 차이는 일부분일 뿐이고 민족 간의 불균형에는 어떤 원인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왜 각각의 문명은 비슷한 시기에 시작 했음에도 지금에 와서는 그 우열이 가려져서 어떤 문명은 멸망했고 어떤 문명은 다른 문명을 파멸 시킬 수 있었는가? 그 궁극적인 원인은 결국 각각의 문명이 처했던 ‘지리적 환경’ 이라 할 수 있다. 문명은 정착생활로부터 시작한다. 수렵민의 이삿짐은 필연적으로 단촐해야 했으므로, 무게가 많이 나가는 발명품을 만들 수가 없다. 그리고 광장이나 성역, 관청과 같은 공공장소도 발달시킬 수 없으므로 문명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정착을 해야 한다. 북아메리카 서안과 같은 먹을 것이 아주 풍부한 곳에 정착한 소수의 예를 제외하고는 정착민이 수렵생활을 유지하기는 힘들다. 정착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경작을 겸해야만하고, 인구밀도가 늘어날수록 경작비율과 생산성을 늘려야 한다. 농업 생산성 향상이 인구밀도를 높이고, 높은 인구밀도가 생산성 향상의 요인으로 작용하는 순환 고리 속에서 초기 문명이 발생한다. 이처럼 농경생활을 선택함으로써 인구밀도와 식량생산 사이의 포지티브 피드백 관계가 형성되었고, 병원균과 수리시설의 건설을 위한 정치체계, 문자와 무기 등 농업이라는 생산방식의 효율성뿐 아니라 그 부산물은 더욱 농업을 지배적인 삶의 방편으로 만들게 된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농경과 목축이 시작된 지역은 4대 문명의 발생지와 그 인근 정도이다. 그곳들의 공통점은 무엇이며, 그 전파 과정은 어떻게 되었는가.

Ⅱ.식량 생산이 문명에 미치는 영향

10만 년 전~5만 년 전. 인류는 유전적인 변화, 즉 현세인의 언어 능력이나 현세인의 두뇌 기능 모두가 가능한 지금의 인간의 신체적 구조로 진화를 이루어 냈다. 이때, 골기, 단일 용도의 석기, 복합적인 도구등도 함께 만들어 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신체적인 진화 뒤에 이루어진 인류의 도약의 형태는 정주형 생활방식의 채택으로 이어진다. 물론 오늘날까지 수렵채집생활을 고수하고 있는 사회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민족들은 식량생산의 채택과 관련하여 농작물과 과수원의 저장된 잉여식량이 있는 곳에 거주하게 되었다. 수렵채집민의 어머니가 거주지를 옮길 때에는 태어난 아기가 뒤처지지 않고 부족을 따라갈 수 있을 만큼의 성장을 기다려야만 한다. 따라서 여성은 성적금욕의 통제를 받게 된다. 반면 정주형 사회에는 그러한 고민이 필요하지 않다. 또한 직접 농사를 통해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게 되므로 이 수렵 채집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높은 인구밀도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정착생활은 잉여 식량을 저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식량을 생산하지 않는 기능 전문가들의 부양을 책임져야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잉여식량의 저장은 농경민 이외의 활동을 가능하게 해 준다. 계급을 만들고 정치조직의 확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수렵채집민의 사회가 식량 저장, 미숙한 추장사회로 까지 발전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왕국이라는 단위로 더 나아가지는 못하는 이유는 바로 수렵채집생활의 한계로 보인다.
식량생산은 정주형 생활을 가능케 해서 소유물의 축적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측면에서 기술의 역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류의 진화에서 최초로 경제적으로 전문화된 사회. 즉 식량을 생산하는 평민들이 식량을 생산하지 않는 전문가들을 먹여 살리는 사회가 발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식량 생산과 정주형 생활은 대형 포유류의 가축화를 만들어낸다. 말, 당나귀, 야크, 순록, 단봉낙타, 쌍봉낙타는 19세기 철도가 개발되기까지 육상운송의 주요 수단이 되었으며, 정복을 위한 군사적 요소로도 크나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어느 한 대륙에서 각각의 사회는 곧 어떤 기술을 발명하거나 채택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성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각각의 사회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혁신적인 면에서 서로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요소들이 모두 동등하다고 가정했을 때 기술이 가장 빠르게 발달할 수 있는 곳은 생산성이 높고 면적이 넓으며 인구가 많은 지역, 즉 잠재적인 발명가도 많고 서로 경쟁하는 사회도 많은 지역이다. 또 기술은 자급자족방식으로 한 사회에서 발명되어 사용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결국 기술은 주변의 사회로 전파되게 된다. 여기서 기술의 수용은 사회적 요건에 따라, 지리적 요건에 따라, 시기에 따라 확산 속도가 달라지는데, 그 사회가 혁신에 대한 수용이 빠른 사회냐 아니냐, 지리적으로 기술 확산에 장애물이 있느냐 없느냐가 기술 확산에 엄청난 영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무리생활로 시작된 인류의 역사는 잉여 생산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전문계급을 만들어 내고 부족사회에서 권력이 인정되는 추장사회로, 또 초기국가 형태로의 발전을 이루어낸다. 이렇게 형성된 국가는 식량생산과 경쟁과 확산의 필요성에 따라 정복을 감행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유럽인들의 세계정복은 식량생산의 이점과 포유류의 가축화, 동서의 축으로 이루어진 기술 확산의 우위성아래 가능한 것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1700년대 유럽인들이 정복 시 사용했던 총은 유럽 측의 정복을 더욱 유리하게 만들었다. 또 유럽인의 쇠 갑옷, 사슬갑옷, 그리고 무엇보다도 쇠 투구는 피정복민이 주로 사용한 곤봉의 타격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 무기로 사용되었다. 가축의 사육화의 대표적인 동물, 말은 탁 트인 곳에서 보병들을 거의 무력화 시킬 수 있는 군사적 무기로 이용되었다.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유럽인들의 정복이 실패하지 않았던 것은 말, 쇠, 무기, 갑옷 등을 갖춤으로써 군사적 우월성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축의 사육으로 야기된 전염병, 예를 들어 천연두, 홍역, 인푸루엔자, 발진티푸스, 선페스트를 비롯한 유럽고유의 전염병들은 다른 대륙의 많은 민족들을 몰살시킴으로써 유럽인들의 정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것이 상당한 면역성을 가진 침략자들에게는 면역성이 없는 민족에서 효과적인 무기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앞서 살펴본 바대로 정주형 생활로부터 시작된 잉여식량의 생산과 동물의 가축화, 지리적인 기술 확산의 이점, 사회의 발달속도와 혁신성 등은 총과 쇠 무기, 균을 중심으로 유럽인들이 세계를 정복하고 주도할 수 있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렇다면 가축화, 작물화에 적합한 동식물이 집중되었으며, 기술의 확산과 수용에도 아무런 장애가 없었던 비옥한 초승달 지대나 중국은 다른 민족에 비해 수천 년이나 앞서갔으면서 뒤늦게 출발한 유럽에게 왜 추월당했던 것일까, 제레드 다이아몬드 박사의 저서 <총, 균, 쇠>는 이에 대한 해답 역시 명쾌히 제시하고 있다.
비옥한 초승달지대에서 국가가 탄생한 이후, BC4000~3000년경 바빌로니아, 히타이트, 아시리아, 페르시아 등의 제국들은 힘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 선발간격을 서쪽 국가에게 추월당하면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할 수 없었다. 옛날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속했던 많은 지역이 지금은 사막, 반사막, 스텝으로 변해있다. 고대 그리스를 포함한 지중해 동부 일대와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많은 지역은 숲으로 덮여있었다. 그러나 이곳의 숲은 농업을 하기위해 개간하고 건축용 목재를 구하기 위해 벌채하고 땔감으로 쓰거나 회반죽을 만들기 위해 태우는 바람에 사라지고 말았다. 더구나 강우량이 적어 생산성이 낮은 편이어서 식물이 다시 자라는 속도가 파괴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다. 동쪽에 있던 가장 오래된 사회들로부터 시작하여 지중해 동부의 사회가 차례차례 자멸함에 따라 힘의 중심은 차츰 서쪽으로 이동했다.
중국은 광활하고 생산성이 높은 땅을 차지했으며, 기술에 있어서도 단연 세계를 선도했다. 주철, 나침반, 화약, 종이, 인쇄술등을 비롯하여 항해술, 제해권 등을 장악한 막강한 국가였다. 심지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수십 년 전, 거대한 배를 가지고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진출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권력투쟁으로부터 시작된 정치적 착오는 절대적인 정치적 통일국가를 이룩한 중국에게 불운으로 작용했다. 한번 시작된 폐쇄적 외교는 절대적 통일국가의 미명아래 철저하게 시행되었고 결국 유럽 여러 나라에 비해 도태되고 말았다. 환경에 선택되었지만 다양성을 허용하지 못한 사회는 결국 자리를 내어주게 된 것이다.

Ⅲ.차별화된 문명의 사례

식량은 생존에 있어 가장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이를 충족시키지 않고서는 문명이 나타날 수 없고, 따라서 문명은 1차적으로 식량 생산의 배경 하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각 문명은 그 문명의 주요 식량 생산 방법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

1.폴리네시아의 마오리족과 모리오리족 (농경 VS 수렵채집)
동일한 선조로부터 출발한 폴리네시아의 원주민들은 각각의 생활환경 및 식량 생산 방식에 따라 서로 다른 방향으로 문명을 이루게 된다.
마오리족은 뉴질랜드 북부에서 생활한 민족이다. 이 지역은 농업에 적합한 자연 환경을 갖고 있고 광물 자원도 풍부하다. 이를 바탕으로 마오리 족은 농경을 시작하여 정주형 생활로 정착하게 된다. 농경 생활은 곧 잉여 생산물의 확보로 이어지고, 정착 생활과 잉여 생산물이라는 요건을 만족하자, 마오리족의 인구밀도는 증가 한다. 즉 집단의 확장이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인구의 증가와 잉여 생산물의 결합은 전문가 집단을 등장 시킨다. 다양한 기술 전문가는 물론, 지배 관료층의 등장이 그것이다. 기술 전문가는 각종 도구의 발달을 가능하게 하였고, 여기서 문명은 한층 더 발전하게 된다. 집단의 확장과 함께 등장한 지배 관료층은 자신의 집단(부락 같은)을 지배하면서 이웃 집단과의 상호 교류는 물론, 갈등, 충돌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 집단은 점점 더 거대화되고, 더 큰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또 집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문명의 발달은 계속적으로 진행된다. 결국 마오리족은 이러한 바탕아래 각종 예술품과 건축물들을 남길 수 있었다.
모리오리족은 채텀제도(뉴질랜드 동쪽의)의 작은 섬으로 이주해온 민족이다. 이들은 마우리 족과 같은 폴리네시아계 민족으로 역시 농경 생활을 하던 민족이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하지만 이들이 채텀제도로 이주해오면서 그 섬의 한랭한 아남극성 기후로 농경 생활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결국 이들은 수렵-채집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는 곧 잉여 생산물의 부족으로 이어지게 된다. 공간적으로도 작은 섬일 뿐만 아니라, 잉여 생산물조차 불충분한 상태는 곧 모리오리족의 인구수를 적은 수로 제한하게 된다. 실제로 이들 부족들은 거세 등의 방법으로 인구수를 조정하였으며, 적은 인구수를 유지하였기에 집단 내부 및 집단 간의 갈등 역시 줄어들게 되었다. 이는 곧, 전문가 집단이나 지배 계급의 등장을 억제하였으며, 그들의 도구나 문명은 수렵-채집 생활에 필요한 수준과 그들의 적은 인구수를 유지할 수 있는 수준에서 머물게 하였다. 결국, 수렵-채집 생활은 부족한 잉여 생산물과 작은 집단생활을 강요하여 이들의 문명이 일정 수준이상 나아가는 것을 강제하게 되었다.
같은 폴리네시아계의 민족이지만, 이처럼 자연 환경에 따라 식량 생산 수단을 무엇으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문명적으로 많은 차이를 야기 시킨 것이다.

2.한족과 만주족(북방민족) (농경 VS 북방민족)
중국에서는 한족과 북방 민족이 동시대에 살게 되지만, 그들의 문화는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이 역시 식량 생산의 면에서 그 차이점을 살펴 볼 수 있다.
한족은 황화, 양쯔강 등의 거대한 강을 토대로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융성해 나갈 수 있었다. 이들은 거대 강 유역에서 농경 생활을 영위하면서 정주형 도시 문명의 발달을 순차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결국 그들은 앞서의 보편적 문명 발달 과정을 거쳐 중국이라는 거대한 땅에서 주도적인 세력으로 성장 할 수 있었다. 거대한 성과 한자 등의 문명과 제자백가로 대표되는 다양한 사상의 정립은 그들이 외부의 기타 집단과는 차별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였고 이는 곧, 중화사상이란 이념 아래 동아시아의 문명을 주도하게 된다.
반면에 북방 민족은 척박한 환경에 의해 목축을 주요 식량 생산 수단으로 삼게 되었다. 그들은 비록 부락 체계는 갖추었지만, 정주형 보다는 이주형에 가까운 생활을 하게 되었고, 잉여 생산물 역시 부족하여 문명의 발달은 한족보다 늦게 되어, 도구를 비롯한 각종 문명의 이기에서는 한족에 의존하여 교류를 필요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북방 민족도 고유한 문명을 갖고 있는데, 이는 훈족(중앙 아시아,카자흐스탄 지방)으로부터 이어받은 등자와 안장이다. 초기 북방민족의 경우, 워낙 말을 다루는데 익숙하여 이러한 등자와 안장을 잘 활용 안 한 점도 있지만, 그들의 목축업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기마병의 등장을 유도하였고, 이는 한족은 물론 유럽 민족과의 전쟁에서 우세를 점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한족의 나라 중에서는 진나라가 이러한 등자와 안장을 이용한 기마병의 발 빠른 도입으로 춘추전국시대를 제패할 수 있었던 하나의 요인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북방 민족의 유목 문명은 전쟁에 있어서 앞서가는 요소를 갖고 있었다.

3.이집트의 특수한 환경
이집트의 식량 생산 방식이 이집트 문명에 끼친 영향은 매우 특수하게 나타난다.
이집트의 경우, 나일강이라는 환경 아래에서 농경 생활을 시작하였다. 나일강은 우기에 약 4개월간 범람을 하게 되는데, 이 범람기에 상류에서 운반된 비옥한 토양이 나일강 중,하류 양안에 축적되어, 범람이 끝나면 비옥한 토지에서 농사를 지어 풍년을 기대할 수 있었다. 이러한 풍부한 수량과 비옥한 환경은 일찍부터 나일강 유역에 문명이 발달할 수 있었던 여건을 마련해 준다. 주목할 점은, 이집트가 고대의 문명을 발달시키면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라는 다른 지역과는 차별되는 건축 문명을 남겼다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이집트의 농경문화와 관련된 한 가지 학설이 있다. 이집트의 4개월간의 범람기에 각지에서 일거리를 잃은 자유농민들을 소집하여 유휴 노동력을 활용 피라미드 등의 각종 건축물을 짓게 하였다는 학설이다. 즉, 범람기에 유휴 노동력을 활용하여 왕과 신권의 권위를 높일 수 있고, 유휴 노동력의 낭비를 막을 수 있었으며, 그 댓가로 정당하게 범람기의 농민들에게 축적된 식량을 분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피라미드의 건축이 나일강 범람기에 불어난 경계에 줄맞추어 지어졌다는 점, 피라미드의 건축이 노예가 아닌 자유민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 한 파라오가 해마다 여러 개의 피라미드를 지었다는 점(무덤이라면 한 개 이상 필요 없을텐데 매년 지은 이유는 다른 의미가 더 컸기 때문). 한 사제의 묘에서 발견된 문헌에 파라오가 공급해준 식량에 노역인들이 만족해하고 있다는 글귀, 이집트 후기에 들어서서 피라미드 대신 신전 등의 건축물을 꾸준히 지었다는 점(역시, 유휴 노동력의 활용위해 세월이 흘러 피라미드 시대가 끝나도 다른 건축물을 꾸준히 지음)이 학설의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 정리하자면, 이집트의 특이한 농사법이 다른 지역에는 없는 독자적인 문명을 발달 시켰다는 점이다.

4. 식량 생산 수단 중 가축과 연관된 각 지역 문명의 특수성.
주요 식문화의 차이가 주된 식량 생산 수단과 연관 지을 수 있음은 당연하다. 예를 들어 목축을 주요 식량 생산 수단으로 삼은 집단(북유럽)은 육류 및 유제품 위주의 식문화를 갖게 될 것이고, 농경을 식량 생산 수단으로 삼은 집단(한국)은 채식 위주의 식문화를, 해안가나 섬에 자리를 잡은 집단(일본)은 어류 위주의 식문화를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반적인 식문화에 대해서는 간단히 넘어가고 여기서는 지역별로 어떤 가축을 키우는가에 의한 차이점만 간단히 요약해보고자 한다.
가축은 고기, 유제품, 비료, 연료, 운송 및 전쟁 수단, 가죽, 의류(털), 노동력(농사)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또한 가축은 질병의 원인이 되어, 가축을 키우는 정착 세력이 외부 세력과의 침입, 갈등 시에 대립 집단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게 해주었다. 이는 가축을 키우면서 집단이 얻게 된 보편적인 특징이다. 그런데, 모든 집단이 같은 동물을 가축으로 삼지는 않았다. 어떠한 동물을 가축으로 삼느냐는 그 집단만의 차별화된 식문화나 생활 방식, 고유의 문화를 결정짓게 된다. 가축의 차이에 따른 문화의 차이를 보면, 어떤 가축을 키우냐에 따라 다양한 특성이 나타나게 된다. 칠면조를 키웠기에 오늘날 추수 감사절이란 전통적인 문화가 남을 수 있었고, 누에나방을 길들이지 않았으면, 비단이라는 옷감의 개발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비단길이란 명칭 역시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개의 경우, 어떤 집단이 길들이냐에 따라 그들 집단의 주요 식량 생산 수단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한 야크나 순록, 라마가 없었다면, 인간이 살기 힘든 고산 지방이나 극한 기온의 지방에서 인간이 살기에 한 층 더 어려웠을 것이고 그들만의 문화를 이루지도 못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가축화의 지역별 차이는 그 지역만의 고유한 문화를 남기거나, 혹은 사람이 살기 어려운 환경에까지 부락이 이루어지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가축과 관련하여 중요한 문화적 차이가 등장한다. 종교가 바로 그것인데, 그 문화권에서 주된 가축화된 동물들은 특이한 경우, 종교와 연관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기독교의 경우, 초기 양을 이끌고 유목 생활을 하던 민족의 특성이 종교에 잘 반영되어 있다. 흔히 양치기와 길 잃은 양떼로 비유하는 성경의 구절은 물론이며, 희생의 제물로서 보통 양을 바쳤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슬람교에서 돼지를 천시하고, 힌두교에서 소를 신성시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힌두교의 경우, 초창기부터 소를 신성시 하고 소고기를 배척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인도의 환경 상 한발과 장마가 번갈아 나타난다. 이러한 기후 조건에서 식량이 부족해져 소를 자꾸 잡아먹게 되자, 우기에 농사를 지을 노동력으로서의 소가 부족해지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소는 농사일에는 물론이고, 그 배설물을 비료나 땔깜으로 이용할 수 도 있고, 우유를 통해 고기보다 더 지속적인 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식량 생산 수단이었다. 이러한 소가 식량 수급이 어려운 때(주로 한발 기후)에 소 자체를 식량으로 잡아먹게 되자, 그 후에 소가 부족해짐으로서의 문제점이 드러나게 되고, 이러한 문제점이 반복되면서 세월이 흘러 힌두교 자체에서 소를 숭상시하고 잡아먹지 않는 풍토가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이슬람의 돼지 천대 풍토 역시 비슷한 경우이다. 이슬람의 건조한 기후에서 돼지는 기르기 힘든 동물이다. 돼지 한 마리를 키우는 데는 많은 양의 물과 사료(곡물)가 필요한데, 이슬람 지역 같이 척박한 지역에서는 용이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돼지를 사육하는데 어느 정도 비위생적인 면을 감수해야 하는데, 이 역시 물이 부족한 이슬람 지역에서는 치명적이다. 따라서, 이슬람 지역에서는 돼지를 먹지도 기르지도 않는 환경이 조성되었고, 이러한 점이 종교에까지 명시된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슬람교도가 아닌 이스라엘에서도 돼지는 천대해왔다. 이스라엘 역시 건조한 기후 조건에서 돼지를 키우는데 드는 불이익이 컸던 것이다. 이 점을 살펴보면 종교 자체가 아닌 환경과 관련된 식습관이 한 사회의 문명, 문화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을 잘 볼 수 있다.
참고)
※가축화 되지는 못했지만 문명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동물
코끼리 - 야생의 코끼리를 생포하여 길들일 수는 있었지만, 감금 상태에서 번식시켜 대대로 종자를 이어받을 수는 없었다. 즉, 가축화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코끼리는 고대 카르타고에서 로마를 상대한 병종의 하나로써 활용되었고, 비록 한 때나마 로마를 위협할 정도로 승승장구한 카르타고의 선봉 부대로 운용되었다. 비록, 결과적으로 로마의 스피키오 장군에 의해 패퇴하기는 하지만, 코끼리 부대의 등장은 분명 고대 전쟁사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동남아시아 지방에서는 지금까지도 코끼리를 이용하여 여러 일을 사역하기도 한다.



Ⅳ.결론

이상과 같은 조사를 통해, 문명의 발달에 미치는 요인을 식량 생산 수단을 초점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사실, 문명의 발달 속도가 각 지역, 집단에 따라 차별적으로 일어난 것은, 식량 생산 수단 외에도 다양한 원인 -지리적, 혹은 사회적 구조, 각 지역 간의 교류 정도 등-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양한 원인 중에서도 식량 생산 수단의 차이는 분명 논의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최초의 원시 집단이 자연적 환경의 영향을 받아 수렵-채취와 농경, 목축이라는 갈림길에 들어서게 되었고 이 최초의 갈림길이 문명의 시작과 발달에 있어서 차별성을 낳게 되었다. 농경민족이 수렵-채취 민족보다 더 나은 문명을 발달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문명을 발달시키더라도 농사냐 목축이냐에 따라 서로 다른 문명을 발전시키게 되었으며, 같은 농경·목축이라도, 다른 식물이나 동물을 재배·사육할 경우, 서로 다른 문화로 갈라지게 되었다. 결국, 식량 생산 수단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양한 문명이 서로 다른 발전 속도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이 앞에서 언급했던 의문점, ‘왜 인류의 역사는 불균형적으로 발전되어 왔는가?’ ‘집단 사이에서 문명 발전 속도가 왜 그렇게 큰 차이를 보여 왔는가?’ 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다. 집단 간의 문명 발달 속도는, 어떠한 생물학적, 인종별 우월성이나 열등성의 존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각 집단이 어떠한 계기로 정착, 식량을 수급해왔느냐에 따라 달라졌을 뿐이며, 문명의 독창성 및 발달 속도 역시 이에 영향을 받아 왔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문명의 고착화를 야기하여 전반적인 발달 속도를 늦추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고, 혹은 다양성의 충돌 속에 발달 속도를 더욱 가속화 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오늘 날 인류 역사의 불균형적 차이로 나타나는 것이고, 또한 문명 간의 독자적인 차별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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