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너 좀바르트 (Werner Sombart)
사랑과 사치와 자본주의 : 까치
물질문화론_채승진 교수님_20070212
김지후_0293032



이 책의 저자 좀바르트는 사회과학, 특히 경제학 연구의 주변에 속하는 경제 외적 변수인 문화의 한 측면, 즉 남녀 간의 성관계, 여인, 사치 등을 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으로 설명하고 있다.

제1장. 새로운 사회

14~15세기‘궁정’이라는 새로운 향락문화의 등장과 시민들의 부의 축적으로 새로운 계층인 신귀족이 되려는 과정에서 스스로 자생하는 초기 자본주의의 형성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궁정

중세 말에 국법질서와 군사제도를 결정한 변혁의 중요한 후속현상인 동시에 이 변혁의 결정적인 원인은 오늘날에 우리가 이해하는 의미로서의 왕후의 거대한 궁정의 탄생이다.
“근대적인”특성을 나타냈던 최초의 궁정은 아마도 프랑스의 아비뇽(Avignon)궁정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그 이후 수세기 동안 궁정사회라고 일컬을 만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그 사회의 토대가 되는 두 집단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귀족집단으로서 그들은 어떤 직도 없었으며 다만 궁정의 이해관계에 봉사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미녀집단이었다. 그녀들은 분망한 나날로 엮어지는 일상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었다.

2.시민의 부

중세 초기에 형성된 모든 형태의 부는 거의 전적으로 토지소유에 의존하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그 당시에는 부자라고 하면 모두 지주였다. 부유한 시민이란 중세 초기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13~14세기 이래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 당시 대규모의 재산이 증가,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이러한 부의 증가는 봉건적 토지소유와 전혀 관련이 없었다. 이는 이탈리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때는 동양으로부터의 수탈이 시작되었던 시대이다. 그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브라질에서 풍부한 귀금속광산이 개발되고 자원개발을 수월하게 해주었던 거대한 금융업과 운수업이 발달하였으며, 한편으로는 투기사업이 성행했다. 그 당시 새로운 시대를 맞아 큰 규모의 개인재산을 형성하도록 해준 뿌리는 결국 위의 세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3.신귀족

구 귀족과 새로운 부유층에서 차츰, 즉 1600년에서 1800년에 이르는 200년 동안에 전혀 새로운 사회계층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신흥 부유층이 귀족의 신분을 얻는 신귀족이라는 새로운 지배계급을 말한다. 이러한 사회계층의 상층이동은 다음과 같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1. 적당한 공적을 세우거나 이런 공적에 필적할 돈을 바침으로써 귀족의 칭호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2. 세습귀족과 관계가 있는 위계나 관직을 부여받는 경우
3. 세습귀족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토지를 획득함으로써, 귀족계층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귀족은 정치적으로 매우 우월한 위치에 있었을 뿐 아니라, 귀족에 속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대우를 받는 이점이 있었고, 물질적, 경제적 수입 면에서도 아주 유리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평민들은 귀족이 되려고 재산을 모았다. 귀족이 된 평민은 전통적인 가풍을 보존하고 품위를 유지하기위해 사치를 함으로써 초기 자본주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제2장. 대도시

사회변화 과정에서 일어난 현상 그 중에서도 전체적인 문화발전의 과정에서 아주 의미 있는 사건은 다름 아닌 도시화였다. 즉 16세기 이후로 도시에 거주하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으며, 그에 따라서 새로운 형태의 도시가 발생했던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도시란, 도시 거주민이 수십만에 이르는 ‘대도시’를 의미한다. 어떻게 도시들이 이렇게 큰 규모로 성장할 수 있었던가를 한번 되돌아본다면 기본적으로 중세와 같은 도시 확대요인이 크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전기자본주의시대의 대도시도 완전한 소비도시였다. 우리는 고도의 소비자들이 누구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군주와 제후, 성직자, 고관들이었다. 이들 집단에 새롭게 포함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대자본가였다. 큰 도시들이 큰 규모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그곳에 최대의 소비자집단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제3장. 사랑의 세속화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든 사회적 움직임 중에서 중세로부터 로코코시대에 이르기까지 행해진 남녀이성 관계의 변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사회는 수세기에 걸쳐서 연애와 결혼을 완전히 분리시켜 생각하는 견해에 사로 잡혀 있으며, 또 수세기에 걸쳐서 특정한 계층에게 결혼과 연애는 서로 분리되어 다루어졌다.
한 사회의 제도 안에서 자유분방한 사랑, 즉 자유연애가 은근슬쩍 파고들기 시작한다면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사랑을 위해서 어떤 형태로든 여인들이 봉사 할 수밖에 없다. 유럽사회의 상층부에서는 순수하게 성애에만 집중된 사랑에 중요한 의미를 두게 되었고 그 결과 유혹, 간통 및 매춘이 수없이 유발될 수밖에 없었다. 궁에서 봉사하는 여자는 군주를 비롯한 궁신의 애첩이 되었으며 동시에 오늘날의 고급 창부가 되었다. 카스틸리오네는 고급 창부에 관한 책 속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아무리 궁정이 거대하다고 해도 여인이 없다면 자랑거리도 찬란함도 즐거움도 없을 것이다. 이와 똑같이 궁신들은 여인의 사랑과 호의를 얻으려고 더욱 분발하지 않으면 우아한 것도 영웅적인 마음도 가질 수 없으며 우아한 기사적인 당당한 행동을 기대할 수도 없을 것이다.”그리하여 애첩이 지배하는 경제 즉 ‘애첩경제’의 시대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17, 18세기에 상류층의 사교계 부인들을 위한 소위“살롱(Salon)"이 나타났고, 고급 창부들의 유행의상과 장식품, 사치, 자기과시적인 화려함 그리고 모든 낭비적 행위들을 사회의 점잖은 부인들이 그녀들을 따라서 의상이나 외모가 화려해지기 시작했다.
카스틸리오네 [Baldassare Castiglione, 1478~1529]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외교관. 당시의 이상적인 궁정인의 처신할 바를 논한 《궁전인》을 저술하여 서유럽 상류사회의 교양에 큰 영향을 끼쳤고 만년에는 에스파냐 대사로 마드리드에 부임하였다.
제4장. 사치의 전개

사치는 필수품을 위한 지출을 초과하는 모든 지출을 뜻한다. 하지만 사치는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것은 양적인 의미와 질적인 의미이다.
양적인 의미에서의 사치는 재화 또는 물품을 낭비하는 것을 뜻하고, 질적인 의미에서의 사치란 보다 질이 좋은 재화를 소비하는 것을 뜻한다. 좀바르트가 말하는 사치는 바로 두 번째 즉 질적인 개념에서의 사치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개인적 사치는 무엇보다도 향락으로부터 얻는 하나의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기쁨에서 일어나고 있다. 눈, 귀, 코 그리고 혓바닥- 그것들의 감각을 자극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품 또는 재화 속에서 완벽한 방법으로 어떤 형태로든 그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쓰는 일용물품들을 통한 사치소비가 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의 감각, 특히 관능적인 느낌을 자극하고 그 자극을 섬세하게 증가시키려는 수단은, 바르게 말하자면, 우리들 남녀 간의 성생활에 근거하고 있다. 감각적인 쾌락의 기쁨과 성애는 결국에 가서 같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에서 나오고 있다. 그리하여 어떤 사치의 전개에 끼어들려는 최초의 충동은 거의 모든 경우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어떤 관능적 욕구 또는 성애의 감각으로부터 발동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사치의 발전경향
1)옥내화의 경향
중세에 행해진 사치는 대부분 공적이었다가 점차 사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개인적이라고 하면서도 개인과는 좀 거리가 먼 집 밖에서 사치가 일어났다. 그러나 시대가 바뀜에 따라서 사치는 점차 집안으로 옮겨와 가정적인 속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2)즉물화의 경향
개인적인 특성이 항상 강조되어 그 결과 양적인 특성을 띠게 되는 현대의 사치는 귀족적인 연원에 기초하고 있다. 귀족들은 가문을 외부에 자랑하기 위해 수많은 하인을 고용하고 많은 물품을 소비하였다. 이러한 즉물적인 사치는 생산적인 손을 작업에 참여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사치수요의 즉물화는 자본주의 발전에서 근본적인 의미가 있다.

3)감성화 및 섬세화의 경향
사치의 감성화가 뜻하는 것은 사치가 점차 이상주의적인 삶의 가치(예술과 같은)와는 달리 보다 동물적이고 야수적인 아주 얕은 수준의 본능과 맞물려 발전한다는 것이다.
섬세화란 어떤 물품의 생산에 있어서 보다 많은 노동력과 보다 강화된 노동력으로써 활기찬 노동을 통해서 소재에 침투하여 흡수하는 것을 의미 한다(열악한 품질의 원료나 소재를 쓴다면 섬세화가 아니다). 그러한 섬세화 작업을 통해서 자본주의적인 산업 또는 상업의 활동범위는 훨씬 더 확대될 수 있었다.

4)압축화의 경향
이 문제는 시간과 관계가 있다. 많은 경우의 사치는 주어진 시간 내에 전파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많은 재료가 이용되며, 많은 원료 획득에 많은 돈이 소요된다. 사치행위는 연중행사처럼 주기적으로 나타나면서 하나의 고정적인 제도로 정착하고 있다.


제5장. 사치로부터의 자본주의 탄생

17세기에 걸쳐서 자본주의의 발전이 급속히 진행되었던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사치를 조장하는 방향으로 경제 정책을 추진했다. 그들이 그렇게 사치를 평가했던 것은 사치가 시장형성의 힘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왕국이라면 당연히 사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만일 부자들이 많이 소비하지 않고 구두쇠처럼 산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굶어 죽게 될 것이다.” 라고 몽테스키외는 말했다.
사치가 자본주의 발전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상업과 농업, 그리고 공업으로 각각 나누어 단편적인 예로 알아보자.

1)사치와 상업
17~18 세기 교역의 주요부분을 이루었던 것들은 인도로부터 수입된 사치스러운 물품들이었다. 18세기 후반 인도산 면직물, 의복은 유럽의 부유층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며 그 결과 유럽의 면직물 산업에 큰 영향을 주어 국내 기업들은 더욱 고급의 옷감을 만들어 내는데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2)사치와 농업
농업분야에서 자본주의는 농부들이 농사를 짓던 땅이 양모수요의 충분한 조달을 위해서 양의 목초지로 전환되는 시기부터 직접적으로 촉진되었다. 이러한 목초지 전환 운동은 근대 자본주의 생성에서 적어도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자본주의적인 조직을 형성한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 둘째, 그것은 땅에 뿌리를 둔 자급자족적인 자작농의 식량공급 활동을 감소시킴으로써 자본주의적인 공업의 생성을 유발, 촉진시킨다는 사실이다.

3)사치와 공업
공업생산이야말로 사치의 영향이 가장 중요하게 나타났던 한 분야이다. 그 중 사치공업을 들 수 있는데, 사치공업이란 결국 사치제품을 생산하는 공업 분야를 말한다. 즉 고가의 의복, 우아한 가구, 다양한 장식품 등을 생산하는 공업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
좀바르트는 모든 분야에서 사치스런 풍토와 소비가 중세의 낡은 가내수공업형태의 산업구조에서 자본주의적인 산업구조로 변모시켰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런 주장은 그의 마지막 말에서 가장 잘 나타나고 있다. “비합법적인 사랑 또는 세속화된 연애의 합법적인 자식은 사치였으며, 바로 이 사치가 자본주의를 탄생시킨 것이다.”



문제제기
자신은 어떤 부분의 사치에 대해 관대한가? 또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몽테스키외 [1689.1.18~1755.2.10]
프랑스의 사상가로 보르도 고등법원의 평정관(評定官)과 원장을 지냈고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10여 년이 걸린 대저(大著) 《법의 정신》을 저술하였으며 사법 ·입법 ·행정의 3권분립 이론으로 왕정복고(王政復古)와 미국의 독립 등에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