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문화론_채승진 교수님_20070212
박진아_0493081

농업_인류문명을 발전시킨 원천


석기 시대 사람이 농업을 처음 알게 된 건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는 뜻밖의 결과 때문이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먹던 고기의 얼얼한 맛을 줄여주는 맛있는 곡식의 씨앗을 동굴 속에 마른땅에 잘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동굴 바닥이 축축해져 씨앗에서 싹이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싹이 나자 그 씨앗은 맛이 없어졌으므로, 자기 뜻대로 되어주지 않는 땅에서 살아야 하는 신세를 한탄하며 씨앗을 내다버렸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로부터 8개월이 지난 뒤 다시 낟알이 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인류는 식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농부 이아시온의 후손들은 끝없이 대지를 사랑해서 쟁기로 땅을 갈아엎고 씨앗을 뿌렸다. 농부는 해마다 이곳저곳 옮겨가며 개간한 것이 아니라 친숙한 곳에서만 농사를 지었다. 이렇게 쟁기질을 하면서 농부는 재산과 토지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결과적으로 소유욕은 악의 근원이 되긴 했지만, 만약 그런 욕심이 없었다면 인간이 지속적으로 토지를 개간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태초의 소유욕은 인간이 처음으로 대지의 주인이 되는 것을 있게 해준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식물이 자생하면서 대지를 뒤엎고 있을 때는, 인간은 손님일 뿐 결코 주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쟁기를 사용하면서부터 대지의 모습이 바뀌었고, 대지는 땅을 갈고 씨를 뿌리는 사람의 것이 되었다. 땅의 주인이 된 인간은 씨앗을 골라 심었다. 씨앗을 골라 심자, 땅은 더 이상 바람의 변덕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획기적인 변화이다. 인간의 쟁기가 파고드는 땅에서는, 더 이상 식물들이 서로 뒤엉켜 마구잡이로 교접하는 일이 없어졌다.
인간은 식물의 삶에 직접 관여함으로써 그 수와 종류를 근절할 수 있게 되었다. 초기의 인류는 농작물을 수확하기도 전에 곤충과 바람에게 빼앗기는 경우가 많았다. 바람은 야생식물의 꽃봉오리를 흔들어 여문 열매를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게 하였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식물들이 바람에 휘둘리는 습성을 차단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로부터 수천 년 동안 인간은 꽃자루에 견고하게 잘 붙어있는 꽃을 가진 식물만 골라 재배하였고, 마침내 성공하였다. 인간이 밀, 호밀 등 많은 야생식물들을 장차 중대한 식량원이 될 재배종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인간의 손에 의해 재배된 식물들은 그 열매가 꽃자루에 아주 단단하게 매달려 있어 세게 흔들어 털지 않는 한 떨어지지 않게 되었다.
인간의 식량이 된 종들은 수천 년에 걸쳐 번성된 형제이다. 다른 곡식들과 그 역사가 전혀 다른 벼를 제외하면, 원시시대부터 인간이 이용한 곡식은 여섯 가지, 즉 이류 초기의 기장, 귀리, 보리, 밀과 고전주의 시재 말엽부터 이용한 호밀, 그리고 아메리카 발견 이후 재배된 옥수수이다. 이 여섯 형제가 1만년이 넘도록 세상의 인간들을 먹여 살렸고 앞으로 인류가 멸망하는 그 날까지 계속 인간을 먹여 살려 줄 중요하고 든든한 식량이 되어 줄 것이다.


문명의 발생에는 지세와 기후가 결정적인 변수였을 것이다. 4대 문명의 발상지는 모두 강을 끼고 있으며, 북위 30도 안팎의 온대지역이다. 문명은 여름과 겨울이 확실한 곳에서 발생하였다.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비축은 필수이기 때문이고, 비축은 잉여자원의 발생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많은 자원을 가진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생겨날 수 있었다. 먹고 사는데 바쁜 시기와 지역에서는 기술력이 발전할 시간이 없었다. 따라서 식량은 인류 문명이 발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식량은 문명의 제 1조건이다. 지금도 식량은 중요한 요소이듯이 먼 옛날에도 도시와 많은 사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식량 확보가 최우선 과제였을 것이다. 따라서 가축을 길들이고 밀과 보리와 같은 곡물을 재배하는 것이 대규모 정착사회를 향한 첫걸음이었다.
인류의 역사에서 정착 사회를 처음으로 가능하게 해 주었던 농업의 발전은 1만~1만2천 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팔레스타인, 요르단, 이스라엘, 시리아에서 시작되어 터키의 남동부와 이라크의 북부를 거쳐 이란의 서쪽까지 연결되는 산기슭의 나지막한 구릉지대, 즉 비옥한 초승달이라 불리는 지역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란 추측이다. 처음 농경을 시작하고 가장 번성했던 비옥한 초승달지대는 여러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지중해성 기후로 겨울은 온난 다습하고 여름은 무덥고 건조하였다. 이런 기후는 야생 동식물이 다양하여 선택의 폭이 넓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기후의 변화가 큰 지역이어서 한해살이 식물이 늘어나게 되었는데 이런 식물들은 일 년 내에 씨를 맺어야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더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은 작물화 시켰던 야생작물들이 이미 풍부하였고 생산성이 높은 작물들이었다. 또 암수가 한 몸에 있는 자옹동주형 ‘제꽃가루받이’ 식물의 비율이 높아서 번식률이 높았다는 점이다. 이런 점들이 이 지역에서 농업이 발전할 수 있게 해준 중요한 요소들이다.

점차 잉여 식량이 증가하고 한 지역에 정착하게 됨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게 되고 이는 중앙집권화, 사회의 계층화, 복잡하고 기술적으로 혁신적인 정주형 사회로의 발전을 가져왔다.

약 5000년 전 우루크 지역에서는 관개시설의 개선과 땅의 개간으로 경작지가 늘어났다. 집약적인 농업으로 더 많은 수확을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튼튼한 성벽이 쌓아지면서 외부의 침략을 막아 낼 수 있었다. 결국 사람들은 더 많은 경작지, 더 많은 식량, 더 안전해진 생활 조건을 따라서 시골을 버리고 도시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현대 산업 사회에 들어서도 볼 수 있듯이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일어났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농업(식량생산)은 도시가 출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관개 농업은 과거 이전부터 있었지만 농업에 필요한 물을 끌어다 쓰기위해 약5000년 전 경 대규모로 관개 공사가 실시되었고 이로 인해 도시가 형성되었다. 수로를 만들거나 제방을 쌓는 관개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여러 촌락이 함께 일하기 위한 센터로서의 ‘도시’가 탄생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큰 홍수가 부정기적으로 발생하였는데 이에 대비하기 위해 여러 도시의 통치자들은 서로 협력하여 많은 수로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협력을 조직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 정부가 생겨나게 되었다.

관개 공사의 센터였던 도시는 인류 사회를 격변시킨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이 도시 안에서 다양한 도구들이 만들어지면서 인류 사회는 급격하게 모습을 바꿔나갔다. 관개 공사는 자연과의 험난한 싸움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기술과 지식이 필요하였다. 쟁이나 괭이등 공구의 발달뿐만 아니라 금속 그릇의 출현, 수송 기술의 발달, 용수로와 제방 건설에 필요한 토목기술의 발달, 하천 및 수로 관리 기술의 발달,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는 시스템의 형성, 자연에 관한 지식 등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물건이나 기술의 체계화를 통해 도시가 성장할 수 있었다.
도시는 지방의 여러 문화를 아우르고, 새롭고 복잡한 문화(문명)를 만들며, 종교적인 체계를 형성하고, 사회적 분업을 발달시켜 전문적 장인에 의한 여러 가지 발명과 기술 개발을 이루어내는 역할을 하였다. 도시는 시장을 중심으로 교역을 벌이고, 관료제 등 정치적 시스템을 정비하며, 토목과 건축 기술을 개발하고, 도로망과 교통기관을 정비하며, 군대에 의한 치안 유지 능력 증대 등에 힘썼다.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도시는 스스로 존속하기 위한 노력을 거듭했던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이윽고 인류 사회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과거의 도시는 농토와 주변 환경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우루크 주변의 평원은 엄청난 양의 밀생산량을 자랑하던 광활한 밀밭이었다. 점점 증가하는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농토와 좀 더 집약적인 농업이 필요하였고, 그 결과로 주변의 환경은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이제야 깨달은 문명화가 필연적으로 환경을 파괴한다는 사실은 농업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문명이 발생하던 바로 그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관개 시설의 개선과 시비법, 적절한 휴경기의 배분, 그리고 사산 왕조와 아랍인이 새로 건설한 거대한 수로 덕분에 죽은 땅이 되살아 날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새로운 땅이 더 많이 개간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지력이 다해 버려진 땅은 사막이 되었다. 이 후 남부평원에 닥친 가뭄으로 수많은 농경지가 불모의 황무지로 변해갔다. 엄청난 농경지가 염화 현상으로 척박한 땅이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렸고 식량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당시의 자료에 따르면 60배까지 상승했다고 한다. 문명화로 파괴되기 시작한 환경은 농업의 근원인 대지를 황폐하게 만들었고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굶주림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환경파괴는 시간이 흐를수록 심각해져 갔지만 인류는 현대에 이르러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고 예방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식량 생산과 인구 밀도의 상승은 상호적 관계로 자기 촉매 작용을 한다. 기원후 1100년과 1250년 사이에 중국 항주와 같은 남부 도시들은 인구가 5배나 급증했지만 농업혁명으로 식량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또 중세 유럽의 일부지역에서는 1100년과 1300년 사이에 10배나 인구가 급증하였는데, 이는 관개시설의 확충으로 새로운 경작지를 개간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현상이었다. 이런 사례를 통해 농업혁명이 인구 증가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식량 생산이 증대되면서 잉여 생산물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사적 소유라는 개념이 등장하였는데, 이러한 사회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개인의 소유, 의지, 권위 등을 상징하는 ‘인장’이다. 약 6500년 전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수메르인 사회에서 자신의 소유물을 명백히 나타내기 위한 표시로 인장이 등장하였다. 점차 교역이 왕성해지면서 정당한 거래임을 확인하기 위한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시작하였는데, 소유권의 확인과 이동이 인장에 의해 보장을 받게 된 것이다. 인장은 부와 권력의 소유권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서 지배계층에게만 필요한 것이었다.

문명의 발달의 매개체가 된 문자의 탄생은 농업에도 영향을 미치었다. 문자는 곡물이나 가축의 수를 기록하는 데 이용되었다. 수확물을 신에게 바치려면 해마다 수확량을 기록할 필요가 있었고, 씨 뿌리는 시기나 우기, 건기를 알려면 역이 필요했기 때문에 문자의 발달은 농업 발달과 정착에 큰 힘을 발휘했다. 농업에 필요한 요소들을 기록해 주고 후손에 전해 주는 역할을 해준 것이다. 요컨대 문자의 발달과 문명의 성립은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농업은 인류 문명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농업이 시작되게 되면서 인류는 수렵생활에서 정착생활로 삶의 방식이 바뀌었고 그에 따라 생산물이 늘어나게 되었고 인구도 증가하게 되었다. 또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됨에 따라 사람들은 주변 지역으로 이동하고 탐색하는 하기 시작하였고,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생겨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뿐 아니라 도시의 형성, 문자의 탄생, 다양한 기술의 발생과 발전, 사회의 발전을 하게 만든 중요한 원천이 농업임을 알 수 있었다.

허버트 카슨은 “그것은 역사상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여기서 그것은 인간이 최초로 알게 된 산업인 농업이 가장 더디게 발전하게 되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영리한 사람들은 수천 년에 걸쳐서 농업을 전적으로 무시해왔고 농사일은 농노나 소작인들의 몫이었다.
19세기가 되어서야 농업에 기계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수확의 전 과정에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이 기계는 미국의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후에 콤바인이라 불리게 된 일체형 수확-탈곡기는 엄청난 경제 혁명을 가져왔다. 농업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사람들은 농업기술이 발전하면 우리 삶이 더 풍요로워 진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 같다. 물론 발전한 농업 기술 모두가 우리에게 좋은 것만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발전하기 시작한 농업 기술의 덕분에 많은 노동력을 줄일 수 있게 되었고 수확량의 증대도 가져오게 되었다. 물론 아직 식량이 부족해 굶주리는 나라와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 더 나아가 미래의 많은 인류가 농업과 이로 인해 파생된 많은 것들로 인해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